1회용




들어가면서
 

  


  2009년, 기축년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작년 광우병 파동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여파로 우리나라에서 소를 길러서 파시는 분들의 한숨소리만 가득한데요, 와중에 참 선물같은 영화한편이 개봉했습니다.
  워낭소리는  2008년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피프 메세나 상을 수상한 작품이었습니다. 피프 메세나 상은 다큐멘터리 부분에서 상을 주는 부문인데, 그때 관객들은 모두 울었다는 후담이 전해지죠. 그정도로 사실 워낭소리는 입소문이 은근한 영화였습니다. 저도 참 많이 보고싶었었는데 지방에 사는 지라 독립영화를 보기는 무척 힘이 들었지요. 와중에 일반 극장에서도 상영한다고 했을 때에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일반 상영이긴 한데, 극장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보통 수도권 중심이나 독립 영화를 상영해주는 작은 상영관에서나 볼 수 있었습니다. 기다리다 지쳐버린 저는 제가 사는 창원에서 그나마 가까운 '진주' 에서 보기로 마음먹었죠. 하지만 여기서 이 영화의 반전이 한번 일어납니다. 작게나마 일반 극장에서 상영하던 워낭소리가 연일 매진사례를 보여주면서 일반 상영하던 CGV 측에서 확대 상영하기로 결정 했습니다. 물론 CGV의 무비 꼴라주라고, 역시 작은 영화를 보여주는 상영관이 있는 곳에서 한정해서 개봉하였는데 창원 CGV가 당당히 포함되어 덕분에 창원에서 이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영화는 요즘 흔히 나오는 영화처럼 화려한 CG나 엄청난 반전, 그리고 충격적인 결말이 있는 영화는 아닙니다.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영화의 연결성, 혹은 편집이 무척 낯설게 느껴집니다. 물론 우리가 이런 독립 영화에 익숙치 못한 것이기 때문이겠지만 그렇게 담백한 맛이 나게 편집을 한 편은 아니었거든요. 뭐랄까 궃이 표현해보자면 워낭소리는 어머니의 재래식 구수한 된장국 같고 요즘 나오는 영화들은 MSG 가 첨가된 인스턴트 식품 같은 느낌으로 표현하면 적당할까요? 우리가 우리의 한국의 것, 한국의 맛을 이야기 하지만 정작 우리가 '한국의' 것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할까요?



  한국의 맛, 혹은 한국적인 것

   

  이제는 촌스러운 옛날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황토방의 뜨듯한 온돌 위에서 잠을 자고, 수박 서리를 하다가 쩌억 갈라서 먹던 그 시원한 맛하며, 논에서 건져올린 미꾸리로 추어탕도 끓여먹고 하던 것들이죠. 저에게도 이젠 흘러가버린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들이 이 영화를 보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우리의 옛 이야기가 이제는 낯섬으로 다가오는 시점입니다. 할아버지가 주인공인 일소를 데리고 옛날 방식 그대로 논을 일구고 모를 심는 모습을 보면서 이게 우리의 옛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참 낯설게 느껴집니다. 
  참 뜨악하는 생각입니다. 분명 우리의 것인데 이 낯섬으로 인해서 이 영화는 한층 더 재미있는 영화가 됩니다. 나이가 조금 드신 분들에겐 옛날에 저렇게 농사를 지었었지 하는 감회가, 어린이들에게는 소가 먹을 거리뿐만 아니라 일하는 소이기도 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체험 하는 기회가 되지요.
  참으로 한국적인 것으로 물들어 있는 영화입니다. '소'가 먹을 것이기 때문에 농약을 절대로 치지 않는 농사를 짓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우리는 또 우리네의 아버지들을 한번 생각합니다. 그리고 진짜 한국적이었던,
'항상 내 자신보다 남을 먼저 배려할 줄 알았던' 우리네의 옛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참 많이 의미있는 영화입니다. 궃이 교육적인 내용이 있으니까, 라는 수식어는 필요 없습니다. 원래는 보통이고 평범이던 일상생활들이 낯설게 하기로 한국인의 저 내면속에 잠자고 있던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그리고 고향에서 힘들게 농사를 지으시는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항상 자식들을 생각하시면서 당신의 몸을 아낌없이 희생하시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전화 한통화 하게 만드네요.






영상미가 주는 우아함이란


  사실 워낭소리의 영상은 더하거나 빼는 부분이 없습니다. 보면, 그저 할아버지와 소가 함께하는 장면 투성이지요. 이런 장면들에 대사도 없고 나레이션도 없습니다. 그저 평온한, 혹은 성한 곳 없는 몸을 이끌고 일을 하는 소와 할아버지의 모습일 뿐입니다. 마치 감독은, 이 영화에, 이런 장면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냐고 말하는 듯 하네요. 그래서 우리는 소와 할아버지, 그리고 할머니의 서로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워낭소리가 그저 할아버지와 소와 할머니의 이야기 일 뿐이라면 큰 오산입니다. 감독은 은연중에 하고싶은 이야기들을 영상으로 보여줍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는 역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시내에 내려와서 우마차를 타고 가다가 시장 입구에서 '광우병 소는 물러가라'고 시위하는 사람들 앞을 지나가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만들죠.







  그렇게 감독은 영화에서 단순히 보여주는 영상으로도 자신이 하고싶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처음에 참으로 투박하게 보여지던 영상들이 후반부에 가면 갈수록 영상미를 더해갑니다. 마치 한폭의 수체화를 보는 것 처럼 아름다운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초반부에 아리송했던 영상들이 후반부에 할아버지의 소에 대한 애정과 더해져서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CG로 도배하고 특수효과가 빵빵한 영화보다 훨씬 영상미가 우아합니다. 촬영팀의 고생이 눈에 선할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들도 많습니다. 이 영화가 단순히 소의 죽음으로 슬픈 영화만이 아니라, 눈으로도 보고 즐길거리가 많은 영화입니다. 
  촬영팀들이 잡은 아름다운 장면들도 눈에 새기면서, 우리네의 시골들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닭게 됩니다. 왜 궃이 외국의 시골까지 찾아가서 외국 시골의 아름다움을 느껴야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워낭소리의 '봉화'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영상미가 주는 우아함이란, 오히려 우아하지 않아서 우아함을 뽐냅니다. 그리고 그것이 워낭소리라는 영화의 영상미 입니다.











이야기와 남겨진 것들





   그렇다고 이 영화가 그저 감동에만 촛점을 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 혹은 아버지 어머니의 삶이기도 한 두 분의 생활을 재미있게 풀어나가는데 좀 더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에 저와 같이갔던 친구도 처음에는 엄청 보기 부담스러워 했죠. 사실 다큐멘터리라 함은 예전부터 TV에서 보여주던 것들은 무척 권위적이고 딱딱한 것들이었습니다. 물론 요즘의 다큐멘터리는 형식도 많이 다양해지고 내용면에서도 참 많은 발전을 보여왔죠. 우리나라의 TV다큐멘터리가 사실 다소 딱딱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워낭소리는 그런 편견을 한번에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습니다. 편집은 최소화하면서 재미는 2배이상으로 올리는 방법으로, 할머니의 말과 역설적으로 보이는 할아버지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처음에 많이 긴장하고 왔던 (나름 다큐멘터리라고 해서) 관객들 모두 즐겁게 웃으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효과는 어린이들을 보면 재미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요즘 나오는 영화와는 틀리게 가족들과 함께보기에 참 좋기때문에 가족단위의 관객이 많습니다. 영화 시작 초기에는 아이들로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오히려 아이들이 더 집중해서 보는 방향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만큼 아이들에게도 충분히 어필 할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습니다. 태어나서 소로 논을 일구어 모심는 것 조차 한번 보지도 못한 아이들이 잘 이해도 안되는 할머니의 경상도 사투리를 해석해놓은 자막을 열심히도 쳐다보고 있죠. 




  그래서 영화란 참으로 크고도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어색했던 첫만남이 세월이 지나 갈수록 사랑으로 변하고 그리고 또 그 사랑이 우리의 행복으로 피어날 때처럼 워낭소리와의 첫만남이 영화를 보는 동안 어느새 할아버지와 할머니처럼 소를 사랑하게되고 그 사랑으로 인해 행복해집니다. 그것이 영화가 주는 위대한 힘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CG로 치장하고 그래픽으로 무장한 것들이 대단하더라도, 진실을 정말 진실되게 보여주는 것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또 진실이 주는 위대함일 것이니까요.  저는 워낭소리를 오랜만에 만나는 위대한 영화라고 감히 칭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소의 해를 맞이한 올해 2009년, 위대한 영화 한편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