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용

요즘 삶이 그렇게 으쓱으쓱하지 않다. 감정이란 이를데 없이 가벼워서 단지 며칠 전만 해도 이제 끝난 것만 같이 느껴졌는데,

아직까지 내게 주어지는 시련 혹은 고통은 마침표를 여전히 찾아 헤매고 있다.

오늘, 뉴스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만감이 교차한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것인지, 죽지 못해 사는 것에 슬퍼해야하는지, 혹은 안타까운 마음을 곱씹어 보아야 할 것인지..

작년 이맘때쯤, 가슴이 찢어지는 경험을 하고 그렇게 눈물도 흘리며, 내가 사는 것이 즐겁다고 말할 수 있을지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나서, 내 심장도 터져버릴 것 같이 슬펐는데, 불과 몇개월 만에 웃으며 지내는 내 모습을 보면서,

누군가의 말처럼 행복의 조건은 하하하 하고 웃는 것이라고 했던가.

나는 내 삶을 즐거이 여기는데 그렇게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뼈를 추리는 차가운 바닷물에서 삶의 끝에 다다른 아이들이 느꼈을, 고통 슬픔 그리고 오만가지 것들을 나는 아직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아이들을 보아서라도 조금 더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내 삶을 만족하면서 항상 고마움을 느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빛나는 4월의 햇살은 이다지도 행복한 미소띄는데


즐거움으로 가득한 뱃고동 소리가 땅끝 마을 언저리에 머문다.


그들에게 웃을 날은 너무나 많았다.


어떻게 내일의 슬픔을 예견할 수 있으랴,


어제의 행복도 부질 없는 것이,


삶은 그렇게 갑자기 혹독하게 몰아치더라.


심해의 기저에서 들리우는 


혹한의 바다, 생존의 메아리.


나의 앞가림에 너무 무심했던가


삶은 혼자 걷지 않는 것인데


그렇게 눈물이 한없이 흐른다.


오늘 밤은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련다.


내 생의 반을 때어 주어서라도


기저에서의 생환을 기적하여


함께 살아가기를 


간절히,


또 간절히


기도해보련다.


우리 마주잡은 손으로


따스한 체온을 함께 나누고


행복한 웃음 지으며


오늘을 함께 걸어 나가자. 


그러니 



조금만 더



* 본 문서에는 드라마 '나인'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약 보지 않으신 분이라면 가급적 글을 읽지 마시길..

 

 

 

 

 

 

1. 서두

 

 

드라마 나인을 이제서야 봤습니다. 재미있는 드라마, 웰메이드 등 많은 얘기를 듣긴 했지만 이상하게 케이블의 드라마는 챙겨보기가 힘들더라구요. 나인은, 생각 외로 무척 재미있는 드라마였으며 잘 만들어진 드라마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의 결말을 보고 나서는 쉽사리 스토리가 이해되지 않고 오히려 더 생각이 복잡해지고 말았지요. 그래서 나인에 대한 결말을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하는지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보았지만 썩 마음에 드는 해석이 없기에 이렇게 제 블로그에 나마 나름의 결론을 내보고자 합니다.

 

 

2. 결말의 해석

 

 

 2-1. '작은 선우' '큰 선우' 로 나누는 결말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가장 많이 나오는 결말 해석으로, 큰 선우를, 과거로 돌아가 죽어버린 선우로, 작은 선우는 그 과거에 존재했던 선우로 나누어 해석하는 결말입니다. 1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향을 통해서, 큰 선우가 과거의 작은 선우를 통해 미래를 바꿀 수 있게 되는데, 이 해석에 따르면 결국 큰 선우는 작은 선우의 미래를 바꾸는데 성공을 하게 되고 (이를테면 뇌종양 같은 것) 결국 해피엔딩으로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회에서 보면 가장 나중의 사건으로 선우와 여주인공 (이름이 기억안나네요) 의 결혼식 장면이 나오는데, 결국 작은 선우는 그 여주인공과 결혼을 하게 되겠지요. (모든 것은 제자리로)

 

 

 

하지만 이 해석에는 맹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작은 선우와 큰 선우를 나누어 본다는 점입니다. 애초에 큰 선우가 향초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은 형의 죽음 때문이었으나 큰 선우가 바꾸어버린 과거에서는 형이 죽지 않고 잘 회계하여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선우는 향을 구할 수 조차 없었을 것이지요. 물론 작은 선우와 큰 선우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혹은 다른 세계라고 생각한다면 이 해석법이 맞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거나 과거로 돌아가서 죽어버린 큰 선우는 작은 선우와 동일 인물이며 이 양자를 나누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과거는 나도 모르게 또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고 내가 거쳐온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써놓고도 무슨 말을 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거나 이 해석법은 과거 여행을 하는 영화나 매체의 시나리오가 항상 주는 '과거는 바꿀 수 없다' 따위에 비견할 수 있습니다. 큰 선우가 과거로 돌아가 죽어버린다면, 작은 선우 또한 과거로 돌아가 죽어버려야 마땅합니다. 큰 선우가 죽는 장면 때문에 지나치게 내용이 복잡하고 이상하게 바뀌어버렸습니다. 애초에 큰 선우가 살아 있었다면 이 해석법도 나름 일리가 있을 수 있었는데 말이죠.

 

 

 

 

하지만 드라마가 주는 내용 상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그렇게 전제를 하더라도 앞으로 제가 내릴 결말의 해석 덕분에 이 해석은 신빙성을 잃게 됩니다.

 

 

 2-2. 마지막 장면에 대한 해석

 

 

 

 

드라마의 가장 첫 시작 부분에서, 형이 히말라야에서 쓰러진 순간 누군가의 그림자가 비춥니다. 그리고 이 장면은 드라마 말미에 다시 등장하여 그 그림자의 주인이 등장하는데, 선우가 나타나서 형을 구하지요. 이 장면에 대해서 해석은 두가지 입니다. 하나는 이 마지막 장면 이전에 네팔로 떠나는 주인공 선우 (앞서의 작은 선우) 가 형을 구하는 장면이라는 것과 네팔로 찾아갔을 때 형은 향을 구하기 위해 죽어버렸고 큰 선우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것을 이용하여 과거를 바꾸려기보다 10년을 더 기다려 형이 산에 죽을 때 형을 구하는데 향을 사용한다는 것이죠.

 

저는 처음 비행기를 타는 장면을 보았을 때에 결국 작은 선우는 큰 선우의 조언을 '나라면 이럴때일수록 단순하고 명료하게 생각하겠다. 믿고싶은 판타지는 믿고 사랑하는 여자는 사랑하면 된다.' 라고 다짐하며 그저 자신이 행동하고 싶은데로 행동하여 결국 1화로 이어지는 마치 '창세기전' 처럼 뫼비우스 띄 처럼 계속되는 스토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히말라야 장면을 다시 보면서 이런 생각은 잘못되었다고 느껴지더군요. 어쨌거나 무엇인가 얘기하고 싶어 이 장면을 사용했다면, 똑같은 삶을 영위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생각은 접게 되었죠.

 

어쨌거나 마지막 장면의 2가지 해석 중에서 10년 더 기다려 향을 사용한다는 것이 조금 더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해석에도 대단한 맹점이 있습니다. 이 해석이 맞다면 형은 히말라야에서 죽어야 하는데, 분명 큰 선우의 현실의 결혼식에서 형은 살아 있습니다. 물론 이 장면도 결국 10년 후의 선우가 형을 구했기 때문에 살아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요.

어쨌거나 저는 이 부분에서 더 이상 내용을 유추해 내기 힘들었습니다. 머리의 한계인지..

 

 

3. 저의 나인 결말 해석

 

 

 

 

우선 첫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화에서 선우는 형의 유품인 향을 피우고 호텔에서 잠이 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에서 잠이 든 선우는 어디인지는 구분이 가지 않으나 (아마 히말라야인 것으로 보입니다.) 눈보라가 몰아치고 눈이 쌓인 곳에 누워 있는 곳으로 이동됩니다. 그리고 향에 불이 꺼지고 잠에서 깨어난 선우의 옷에는 눈이 묻어 있죠. 이 장면을 단순히 초반의 '실수'로 판단할 수 있지만 실수가 아닌 장면이라면 향이라는 것이 과거로 돌아가게끔 하는 도구가 아니라는 얘기가 됩니다. 물론, 10년 전에는 해당 호텔 위치에 호텔이 존재하지 않고 눈이 쌓여있는 곳이었다 판단할 수 있겠지만 포카라 지역은 겨울이라고 하는 12,1,2월 최저기온이 1~10도 최고 기온은 20~25도 사이로 무척 따뜻한 곳인 문제가 있습니다. (http://airrock11.blog.me/90112477191)[각주:1] 즉, 제가 내린 결론은 향은 과거로 돌아가는 열쇠가 아니라 단순히 사람에게 환각을 일으키는 장치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얼토당토 하지 않은 결론을 내리냐면, 바로 이 첫번째 장면이 이후에 있는 장면들을 의심케 만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장면을, 단순히 제작진의 실수가 아닌 한에서 설명할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선우는 뇌종양 때문에 발생한 환각이며 이후에 존재하는 과거를 통해 미래를 바꾸는 것은 모두 허황된 생각일 뿐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선우는 향을 통해 미래를 바꾸는 장면에서부터 (친구에게 메일과 카드를 쓰는 장면) 뇌종양으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하는, 선우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들이라는 것입니다.

 

 

4. 결론

 

사실 제가 내리는 결말 해석도 억지에 가깝습니다. 웰메이드 드라마라는 얘기를 듣고 있지만 중반 이후로부터 지나치게 이야기에 혼선을 주는 바람에 드라마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느낌입니다. 물론 잘만든 드라마인 것은 분명하나 제가 제시하였던 문제점을 모두 설명해주지는 못하지요 그래서 저는 전부 의도한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이런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 물론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보신 분들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재미있게 본 것은 사실이고 결말에 대해서 나름 고민도 되는 참으로 재미있었던 드라마 였습니다. 안보신 분들도 꼭 한번 보시고.. 아참 보신 분들만 보라고 했군요..

 

 

  1. 날씨 정보 참조하시면 됩니다. [본문으로]

1. 평등과 불평등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민주 공화국은 공화국의 분류에서도 국민에게 주권을 부여하는 국가로, 귀족·계급 공화국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 민주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귀족이나 계급을 부정하는 모두가 평등한 사회라는 것이다. 이는 곧 헌법 제 111항의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조항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근거가 된다. 요체는 평등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이다. 이 문구가 가지는 함의는 재미있다. 국민은 법 뒤에서는 불평등 할 수 있다는 것. 정치·법적 평등은 존재하나 경제·사회적 평등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실제로 우리 대한민국의 사회는 불평등하다. 최근에 이슈가 되었던 문제를 예로 들면, 5급의 국가고시에서 시험을 쳐서 합격하는 고시형태를 줄이고 특채를 늘린 것이다. 실상 이는 단지 통과용으로만 이용되던 국가고시의 비효율성을 없애고 보다 효율적으로, 이미 회사에서는 통용되는 특채형태의 인원을 충원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명환 외교부장관 딸의 특채사건으로 사회적 파장으로까지 퍼지게 되었다. 이런 사건들을 보면서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된다고. 이런 말이 내포하는 의미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우리들은 암묵적으로 인정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소득분배의 불균형을 매년 통계청에서 수치를 내는데 그 수치는 다음과 같다.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09년도에는 낮아졌다곤 하지만 그 낙차가 미세하므로 매년 증가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불평등이라는 인식은 결국 불평등한 현실의 발현으로 이어진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매사가 긍정해지고 부정적 생각을 하면 매사가 부정적이 듯, 불평등하다 믿을수록 사회는 진짜 불평등하게 바뀌어 간다. 깊게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긴 하나, 실재하는 불평등이 불평등을 만드는 것인지 아니면 불평등하다 믿는 것이 불평등을 만드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이것이 아비투스의 개념이기도 하다.)

 

2. 아비투스

 

맑스에 의해 정초된 계급이론에서 계급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와 소유하지 못한 자로 자본가계급과 프롤레타리아계급을 형성하게 되고 양 계급 간에 착취-피착취의 관계가 형성된다고 본다. 베버는 이와 달리 경제적 요인에 의한 계급, 사회적, 문화적 차원의 신분집단 혹은 지위, 정치적·권력적 차원에서 파당을 통해서 계급이 분화된다고 본다. 부르디외는 이 두 학자의 고전적인 계급의 개념에 구별되는 아비투스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아비투스란 인간행위를 생산하는 무의식적 성향으로, 사회적 행위 주체의 행동원칙을 결정하는 일련의 획득된 기질 혹은 성향이라고도 한다. 부르디외가 표현하는 아비투스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아비투스는 지속적이면서 전환이 가능한 성향들의 체계이다. 그런데 아비투스는 과거의 모든 경험들을 통합하면서 매순간마다 인지, 평가와 행위의 주형으로 기능한다. 아비투스는 또한 동일한 형태의 문제들을 해결하게 하는 틀의 유사한 이동과 실천의 결과에 의해 변증법적으로 생산되고 얻어진 다음 결과들이 지속적 교정에 기초하여 수없이 분화된 임무의 수행을 가능하게 한다., 아비투스란 특정한 사회적 환경에 의해 획득된 성향, 사고, 인지, 판단과 행동의 체계라고 한다. 이는 단순히 사회 환경에 의한 사고와 행위를 재생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갖는다고 한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아비투스를 전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인과 소작농 관계로 표현하는데, 주인이 소작농을 잡아두기 위해 단순한 물리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 주인과 소작농의 신의 관계에서 주인은 이를 유지하기 위해 명예에 호소하고 더 나아가 소작농에게 자신의 이익 일부를 양보하기까지 하게 된다. 이러한 지배양식의 궁극적인 토대는 사회구조의 문제가 아닌 개인 간의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부르디외의 주장이다. 앞서 밝힌 맑스나 베버의 경제적 생산관계를 통한 권력의 형성과는 확연한 차이점을 보이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사회학에서 매우 중요한 학자로 상징적 폭력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 상징적 폭력은 집단적 오인, 형태화하기, 상징적 연금술의 특징을 가지게 되어 피지배자의 복속을 끌어내는 것을 전제로 한 지배의 양태로 설명한다. 이때 피지배자는 이런 복속의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게 되고 그 이유는 폭력의 효과가 사회적으로 주입된 믿음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결국 상징적 폭력으로 전개되는 사회적 현상들은 모두 아비투스를 지칭하는 하위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아비투스는 육체의 사회적 사용을 구성하여 지배양태를 결정짓는 기초로, 또한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는 육체적 행동의 결과물로 파악하고 있다.

어쨌거나 부르디외의 아비투스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취향의 문제로, 어떤 옷을 입을 것인지 어떤 음악을 들을 것인지에 대한 개인적인 문제는 사실 계급적 질서를 반영하여, 취향은 결국 계급을 표현해주고 지배적 위치에 있는 집단이 아비투스를 매개로 피지배집단에 상징적 폭력을 행사하고 그를 통해 지배의 정당화와 질서를 유지시키게 된다. 지배자는 자신들의 취향과 사고의 무의식적 취향 혹은 습속을 보편적이고 우월하고 고상한 것으로 드러내어 피지배자의 취향 혹은 습속을 저급하고 추하고 열등한 것으로 인식시키게 된다. 이를 통해 인식을 자연스럽게 관철시키고, 피지배자를 지배자에 복속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3. 아비투스와 불평등

 

서두에서 밝혔 듯, ‘안될 놈은 안 된다는 인식, 더 나아가 못 배운 게 한이 되거나 백 없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인식은 개인적인 문제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전반의 매커니즘내에서 학벌(학력자본), 집안(상징자본), 연줄(사회관계 자본)의 관계성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일정 시점에서 개인이 가지게 되는 학력 자본은 출신 가정의 경제적 수준을 나타내고 주로 상속되는 문화자본의 양과 학교교육 제도에 대한 투자경향 (과외나 학원 따위의) 크기에 따라 결정되고 교육기관에서는 문화자본이 가장 풍부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학교적인 위계를 높이려는 경향을 보인다. , 교육이 인성의 형성을 목표로 한다는 다소 휴머니즘적인 이상과 달리 실제로는 계급, 계층을 차별적으로 생산해내려는 도구라는 것이다.

평등에는 흔히 두 가지의 종류가 있다고 한다. 결과의 평등, 기회의 평등이 그것이다. 결과의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모두가 기회의 평등에 고개를 끄덕인다. 다만 여기에서 매우 큰 함정이 존재하는데, 기회의 평등 -업적주의- 가 보장되었는데 그 결과론적으로 불평등한 것은 정당하다고 보는 것이다. 앞서의 아비투스는 기회의 평등이란 존재하지 않는, 오히려 기회의 불평등이 제도화되어있음을 암시적으로 나타낸다. 불평등의 예로 부르디외가 소개하는 것은 전쟁을 통해 농촌사회에서 결혼관습을 지배하던 경제적 요인이 달라졌고 돈이 없어 장가를 못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물에 걸맞는 세련된 몸짓, 부드러운 말투, 유행에 민감한 옷차림이 부족하여 장가를 못가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아비투스는 사회전반의 메커니즘에서 작용하여 도시와 농촌에서 태어나는 각각의 사람에게 기회의 평등이 아닌 기회의 불평등을 야기하게 된다. 불평등은 제도로써도 발생하지만 우리 내제적인 관습(습속)을 통해서 발생한다는 사실. 참 재미있는 발상의 전환이다.

 

4. 한국의 아비투스

 

(1) 한국의 아비투스

 

한국의 사회학에서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논의를 수용하는 것은 더욱 조심스러워야 할 필요가 있다. 부르디외의 논의가 프랑스 사회의 문화적 배경을 토대로 하고 있고, 프랑tm 사회는 계급에 따른 일상생활의 차이가 뚜렷하고, 가족생활을 중심으로 일상생활이 이루어짐으로써 가족문화를 통한 계급문화의 형성과 구별 짓기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반면 한국사회는 프랑스와 같이 오랜 기간을 두고 형성된 가족중심의 계급 문화는 아직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가정에서 가장은 회사형 인간으로 기업 중심의 생활이 이루어지면서 가족생활은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가족 단위의 독특한 문화적 소비와 취향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부르디외의 논의는 좀 더 조심스럽게 수용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경제적 불평등

 

우리나라는 97IMF 위기 전까지 무척이나 지속적이고 빠른 경제성장을 보여왔다. 외환위기로 경제공황을 경험한 우리나라는 수많은 중소기업이 도산하고 대기업도 대량 감원과 구조조정을 통해 조직의 변화를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전문직 혹은 관리직 중간계급도 고용상 지위를 위협받으며 중산층 위기론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는데, 중산층이 가지는 위치는 상대적으로 높은 소득과 고용안정을 누리는 계급이었다. 중산층이 사라지게 됨으로 우리나라는 양극화현상을 빗게 되었다. 사실상 외환위기로 실업자가 된 사람은 중산층보다는 노동자계급에 몰려있었고 우리나라의 불평등 재생산이라는 측면을 더욱 가속화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노동자 계급의 자손들은 그들의 취향이나 소비양식 등으로 나타나는 상징적 능력이 학습능력의 차이로 전환되며 학업성취에서 계급별 차이를 만들어낸다. , 못난 놈에게 못난 자식이 생산되는 것이다. <합리적> 경제 앞에서 그리고 <합리성> 앞에서의 불평등, 또는 경제적 태도의 변화에서의 불균등한 리듬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의 반영이라는 사실이다.라는 부르디외의 말처럼 합리적인 경제가 가지는 합리적인 평등이 실상 불평등하다는 사실을 보며 한국경제에서도 충분히 불평등의 아비투스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성적 불평등

 

남성적 지배는 가족관계나 결혼, 주체와 객체, 주인과 수단이라는 사회적 인식을 통해 구성되어 남녀의 불평등이라는 지배관계를 성립한다. 시간의 관념에서 과거로부터 지속되어 이어지는 인식의 태도에서, 한국사회는 이러한 성적 불평등이 가장 강력한 아비투스로 기능해왔다. 물론 후기자본주의사회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경향은 사회구조적으로 많이 개편되고는 있지만, 아비투스의 구조화된 구조그리고 구조화하려는 경향을 탈피하지는 못한다. 즉 여전히 남녀차별의 아비투스는 구조화되어있고 또한 구조화하려는 경향 때문에 불평등을 계속해서 재생산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의 사회적 매커니즘의 작용은 은연 중에 표출되어 남성 스스로도 여성을 차별하는지 모르고 여성 스스로도 남성이 여성을 차별하는지 모르는 사태가 발생한다. 물론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불평등은 해소되고 어느 일정부분에 있어는 오히려 역차별적인 행태가 나타나긴 하지만 이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깔린 것으로 우리의 아비투스를 깨뜨리진 못한다.

 

(4) 남북관계와 아비투스

 

남북관계는 아직까지 대립각으로 우적(友敵)의 구분이라는 이분법 논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관료들의 경직된 사고방식, 자유주의와 주체사상의 이데올로기 대립, 남한에서는 훕수통일에 대한 바람, 더 나아가 흡수통일의 논리에 경제논리가 기초되어 남한이 북한보다 앞서 있다는 보이지 않는 우월감이 작동한다. 또한 우리는 현대 대한민국에 이르기 까지 적국인 북한에 대한 반공이미지를 국가적 차원에서 만들어갔다. 일상생활에 침투해 있는 매스미디어의 조작, 언어의 관행은 북한에 대한 강경 이미지를 재생산하고,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서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작용하여 오히려 북한에 대한 동지의식보다는 적으로 구분하는 분단의 언어를 생산한다. 분단국가라는 특수성으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현재 정부에서 행하는 일련의 정책들이 이러한 북한에의 아비투스를 생산하게 되었고 이 문제는 어쩌면 우리나라에 팽배한 좌-우익의 논쟁에서 파생되어 발생한 것일 지도 모른다. 정권이 보수적인 집단이 차지하게 되면, 사회는 북한을 옹호하거나 진보적이면 빨갱이로 매도하는 식의 아비투스를 양산하는 정책들을 펼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보수집단의 정치권력을 유지하는 방식이고, 마찬가지로 진보집단이 정치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으로도 사용된다. 우리나라는 대대로 보수적인 집단에 의해서 지배되어왔고 그로인해 수십년에 걸친 북한에 대한 아비투스가 전수되어 온 것이다.

5. 아비투스의 극복

 

사회 경제적 전반적인 계급성은 치자와 피치자간 약탈의 형태로써 지배를 한다는 것과 당한다는 것이 단순히 사회 구조적 문제만이 불평등을 야기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비투스를 알아가면서 우리 육체 내에 각인 되어 버린 스스로를 구속하는 불평등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도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언제나 사회학의 결론은 사회란 결코 하나, 두 개의 개념으로써는 도통 설명할 수 없는것이 때문에 맑스나 베버의 계급론이나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베르크손의 창조적 진화론 등 복합적으로 야기되는 것이다.

부르디외의 입장에서의 아비투스 극복은 불가능에 가깝다. 부르디외는 혁명이라는 의식이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전제된 경우에만 비로소 움트기 시작한다는, 현재가 경제적으로 철저히 박탈당한 소외 상태에서 미래란 아무 것도 보장 할 수 없는 처참한 상태의 연속으로 인식되어 그 상태에 빠진 계급의 혁명 의식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경제적 상태가 사회적 모순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의식마저 박탈당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부르디외는 아비투스의 개념을 부정적인 의미에서 사용하였으나, 긍정적 입장에서 사회 질서유지를 위한 일상생활의 행위패턴이기도 한 아비투스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게 되면 사람들 간에 평판이 일상생활의 행위 패턴을 규정하는데 중요하게 작동하게 되어 법이나 물리적 강제 이외에도 사회질서를 생성하고 유지시키는 보다 근본적인 기제 -규범-로써 작용한다는 견지도 존재한다. 결국 문제는 문화, 사회, 경제 등을 거쳐 인간 문제로 귀결된다.

정말 어려운 문제이다. 어쩌면 사회학에서 계급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가장 큰 고민이 아닐까 싶다.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서는 계급을 타파해야할 것이고, 계급을 없애는 것이 정말로 가능할 것인가? 계급의 발생은 어떻게 보면 자연적인 것일 지도 모른다. 가장 원초적인 동물의 세계에서도 그들을 통제하는 우두머리가 존재하고 먹이를 많이 먹는 동물이나 먹이를 많이 못 먹는 동물이 생기게 된다. 그렇다면 자연 발생적인 계급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인가? 인간은 생각이 있는 동물이다. 또한 서로 대화하고 이해할 수 있는 동물이다. 사실상의 계급을 없앨 수는 없어도 그 격차는 충분히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보편이성처럼 인간은 합리성에 근거한 이성을 가지고 서로 부정의 아비투스를 없애 나갈 수 있다. 그것이 실상 무의식의 발현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찾고 고치려는 이성에 근거한 노력들은 결국에는 인간에게 보다 평등에 가까운 사회를 선물할 것이다.

 

 

참고문헌

홍성민, 2000, <문화와 아비투스, 부르디외와 유럽정치사상>, 나남출판

양은경 5, 2002, <문화와 계급, 부르디외와 한국사회>, 동문선

파트리스 보네위츠, 2000, <부르디외 사회학입문>, 동문선

신광영, <한국의 계급과 불평등>, 을유문화사

피에르 부르디외, 1995, <자본주의의 아비투스-알제리의 모순>, 동문선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 새물결

 

 

 

*  예전 과제를 할 때 작성했던 문서로 아비투스라는 말의 의미를 나름 정리해본 것이며, 이 내용이 정확하다고는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단지 제 생각에 가깝습니다.

 

지구상에서 인간은 유일하게 의미가 있는 말을 사용합니다. 어떤 동물도 우리처럼 목에서 나오는 소리에 의미를 부여하고 규정할 수 없지요. 그래서 인간은 노래하고, 시를 쓰는 동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언어가 주는 기능은 비단 좋은데만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언어 안의 함축된 용어를 통해 통제받고 조작당합니다.

 

1. 무상복지

 

http://idp.or.kr/issue/issue01.html?table=issue1&mode=view&sno=12&search=&field=&cate=&b_idx=5

사진 출처 : http://idp.or.kr/issue/issue01.html?table=issue1&mode=view&sno=12&search=&field=&cate=&b_idx=5

 

작년 총선의 최대 화두입니다. 무상복지, 무상급식, 무상보육 ... 대한민국을 뒤흔든 말이죠. 이러한 무상 복지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어떻습니까? 무엇이든 공짜로 얻을 수 있을 것 같으며 무료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무상이라는 단어를 통해 끌어내는 담론은 단순히 여러분에게 모든걸 퍼주겠다는 의미만 뜻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무상복지를 한다는 당의 표제어를 보곤 반대당으로 인식하는 당은, 유상 복지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민주당은 말로 장난을 쳐 많은 재미를 보았던 당이었고, (물론 한나라당은 그렇지 않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지금까지도 말장난식 선동에 선두주자로 나서고 있지요.

물론 무상복지, 보편적 복지에 대한 주장이 완전히 틀린 주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보편적 복지는 거짓말이라 믿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의견을 가진 남을 틀렸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의견의 찬, 반을 떠나서 이런 단어를 끌어다 사용하는 것은 대단히 치졸하고 더러운 짓이라는 점입니다.  대표적 행태는 바로 '나쁜 투표'라는 용어를 가져다 쓰는 것이지요.

 

 

출처 : http://www.peoplepower21.org/StableLife/813872

 

참여연대 홈페이지에서는

 

야당과 무상급식실현을 위해 활동하는 시민단체들은 이 불법적인 주민투표에 대해서는 투표에 참여해서 반대표를 던지는 것보다 투표에 불참해서 주민투표 성립을 거부하는 것이 보다 분명한 의사표현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투표율이 일정 비율에 이르지 못하면, 주민투표는 찬반의 가부 자체를 확인하지 않게 됩니다. 투표에 불참하자는 움직임은, 국가가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에게 당연히 시행해야 할 의무급식의 문제를 찬반을 확인하는 절차까지 이르게 하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은 데에다가,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오세훈 시장의 잘못된 주민투표 발의 자체를 반대한다는 의사표시로서 '투표에 참가하지 않는 것'이 옳은 의사표시라는 것입니다.  

 

라고 얘기합니다.

甲 이야기

나는 생각한다2011. 10. 10. 12:45

 

  종범申 이라는 응원 피켓은 사실은 종범神을 잘못 표기한 것이었다. 이 종범신이라는 말은 어떻게 와전되어 종범甲으로 읽혀지는데, 여기서 갑이다, 니가 갑이다 라는 식의 갑이라는 말이 널리 퍼진다.


  갑이라는 말은 법학을 전공하면서 무조건 알아야 하는 단어 중 하나이다. 나는 한문을 지독하게 못해서 읽는 것이라곤 一 二 朴 日 月 따위의 초등학교 수준 뿐이었고 덕분에 법학을 전공하면서 가장 애를 먹었던 부분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한문으로 뒤덮힌 법학 서적들은 도저히 읽을 수도 없는 물건이었던 것. 1학년때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 전공이라곤 민법총칙 하나 였지만 한문에 대한 압박은 최고였다.
   어쨌거나 그런 힘든 시절을 보내면서 나도 어느정도 한문을 보는 눈이 틔였다. 물론 아직까지 못읽는 글자는 엄청나게 많고 전공서적에서도 해맬때가 무척 많지만 이제는 옥편이나 사전없이도 대충 단어 뜻을 유추해낼 정도가 된다. 참으로 다행이다. 1학년때는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甲이라는 단어도 못읽을 정도였으니까

  서두가 너무 두서가 없구나, 그러니까 하고자 하는 얘기는 대충 이런거다. 법학에서 甲이라는 위치는 무척 중요한 위치다. 어떠한 민법 계약 문제를 논하고자 하면 항상 나오는 예시에선 甲乙丙丁의 순서로 사람을 표기한다. 을병정도 중요한 위치에 있지만 갑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자가 있을까? 대부분의 법학 문제는 갑에서 이루어진다. 갑이 을의 집을 구매하지 않았더라면 을은 병에게 이중매매로 자신의 집을 팔 일도 없고, 또 형법에선 갑이 야밤에 절도를 저지르러 남의 집에 침입하지 않았더라면 이 문제가 주거 침입 문제가 될지 않될지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요즘 얘기하는 갑이라는 단어를 보면서 매우 오묘한 기분을 느낀다. 그냥 신이라는 표기가 잘못 전해져서, 신god 대신에 사용하는 말로써 사용하는데, 이게, 이 갑이라는 표현이 그렇게 웃기거나 재미있는 표현은 아니란거다. 사실 갑이 진짜 갑이다. 갑이 神인거다. 법학에서의 갑이 없다면 갑은 갑이 아니라 을이되었겠지. 하지만 어쨌든 갑은 갑으로써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며 모든 이야기의 끝으로 간다. 

  예로 들면, 갑이 을에게 어쩌구 저쩌구 해서 어쩌구 저쩌구 했다. 그래서 갑이 할수있는 일은? 갑이 을을 때리고 어쩌고 해서 어쩌고 했다. 그래서 갑의 최책은?

  그렇다. 법학에서도 갑은 갑이다. 우리가 쓰는 갑이라는 말이, 우스꽝스러운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 오묘한 맛이 있다. 그 의미는 비록 와전되고 왜곡되서 쓰이지만 우리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쓰는 말에서, 사실은 여기에 쓸수 있는 가장 적합한 단어를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 아닌가? 어쩌다가 쓴 갑이 진짜 神같은 존재일 줄이야

 
  영화 소셜 네트워크를 봤다. 데이빗 핀쳐 감독의 영화는 즐겨 보는 편은 아닌데,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보고 숙면을 취해서) 하도 호평을 하길래 한번 봤다. 근데 역시나 실망하고 말았다. 데이빗 핀쳐 감독 영화는 정말 내스타일은 아닌듯.. 그저 일상적인 다큐맨터리 같은 느낌일 뿐 하고자 하는 내용을 내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들더라. (혹은 와닿지 않더라) 와중에 현재 우리나라에 불어닥친 연평도 사건에 물밀듯이 터져나온 SNS의 문제점들을 보며, 아 데이빗 핀쳐 감독이 하고자 한 이야기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더라.

  SNS, 즉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는 기존의 블로그나 홈페이지가 가지는 폐쇠성의 한계를 깨는 새로운 방식의 네트워크이다. 블로그나 홈페이지가 작성자의 의지를 단순히 읽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면 SNS는 그 방향성이 쌍방으로 흘러, 작성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어지고 작성자=독자 이며 독자 = 작성자인 형태가 발생한다. 이 SNS의 혁신을 일으킨 Facebook 이라는 서비스를 만들었던 사람의 제작 과정을 그린 영화가 영화 소셜 네트워크이다. 이 영화는 그저 사실에 기반하여 제작 과정에서 벌어지는 내부적인 갈등이나 법적인 문제점들을 FACT에 기대어 영화적인 허구를 약간 가미한 영화로, 반전이나 멜로도 없고 잔잔하게 흐르다가 우리가 알고있는데로 끝난다. 하지만 이 영화를 처음 볼때 포찰할 수 없었던 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SNS가 가지는 함정을 영화에서 노골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SNS는 언제 어디서나 남들과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덕분에 무분별한 유언비어나 헛소리가 쉽게 퍼지고, 또 아는 사람을 통해 (혹은 팔로잉 중인 사람을 통해) 전해 받기 때문에 인터넷에 떠도는 것들 보다 더욱 더 신뢰가 간다. 또한 마음 속에서 담아두던 생각들을 남들과 나누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 속마음이 누구에게나 공개된다는 문제점도 안고 있다. 하지만 영화 소셜 네트워크에서 말하고자 하는 문제는 이런 문제와는 다르다. 결정적으로, 소셜 네트워크는 SNS를 통한 대화가 현실의 대화를 죽인다는 것이다.

  작금의 상황에 쏟아져 나오는 트위터나 미투데이에서의 무개념녀 시리즈들을 보면서, 나는 오히려 무개념녀를 한탄하기 보다는 SNS 서비스의 맹점이 격렬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생각은 자기 마음속에서 존재할 때 생각일 뿐이지, 그것이 SNS에서 글로 나타나면 그건 더이상 내 생각이 아니다. 남들에게 전하고 싶은 대화이다. 이 대화가 네트워크 상태에서 모두에게 전해지고, 그 대화가 개념이 없다면서 비난을 받는다면 그건 비난받는 이의 당연한 업보일 뿐. 실상 더 큰 문제는 소셜 네트워크가 현실의 대화를 죽이고, 단지 네트워크 상에서만의 힐난과 비난 그리고 다툼만이 존재하고 사람들은 더 이상 나가서 싸우거나 쟁취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비난받는 무개념녀들도, 그들 자신만의 문제만이 아니라 현실 대화가 죽어버린 그들의 현 상황에서 왜 우리가 슬퍼해야하고 노해야하는지를 전해 받거나 전해 들을 대상이 없었다는 것이다.

  SNS는 혁신적이다. 혁신이 지나치면 혁명이 되기도 하고 구테타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이용하는 것들에 대해 이용을 못할 망정 오히려 휘둘리게 되면 SNS의 구테타에 우리는, 지배받을 수 밖에 없다. 더 편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이전에, 더 옳은 것이 무엇일지 생각하는 때가 온 것이다.


우선,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다른 분들과 의견차이가 있을 순 있습니다.

혹시 고등학교 재학중인 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 글을 남기네요. 저는 법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먼저 대학의 필요성부터.

고등학교 시절에 선망의 대상인 대학교가 막상 다니기 시작하면, 고등학교와 다른 점이 거의 없다는 거에 먼저 실망하게 될겁니다.

물론 대학생이라는 이름은 고등학생과 달리 자유 분방한 점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고등학교 공부와 다른 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1학년때 교양수업을 들을 때에나 고등학교와 다르구나 싶지만, 2학년 3학년이 되면서 전공에 치이다 보면,

즉 1천페이지가 넘는 전공 서적으로 이론공부만 하다보면,

실상 '공부를 위한 공부' 보다는,  '학점을 잘 받기 위한 공부' 로 변질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즉 옛날에 대학교에서 자신의 전공에 몰두하고 심도있는 탐구를 하는, 그런 대학교는 거의 없다 봐도 될겁니다. (아마..)

오히려 심도있는 탐구는 대학원에서 하는 것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는데에 투자하는 모든 것들은 '어떻게 하면 성적을 잘 받을 것인가' 에 촛점이 쏠려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비단 대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문제가 이어지는 것이겠죠.

대학을 학문을 연구하는 곳이 아닌, 취업을 위한 관문이라는 생각, 고지식한 과를 졸업하면 사회 나가서 할게 없다더라 하는 생각들.

 

그러니까, 사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대학교는 단순히 졸업장을 받는 곳입니다.

나는 이러이러한 학교와 학과, 그리고 이러한 점수를 받은 대단한 사람이니 이 회사에 취직 시켜달라는 정도의 것?

 

두번째로 4년제와 2년제.

취업률로만 보자면, 잘나가는 2년제 전문대가 훨씬 취업이 잘됩니다.

하지만, 사회에서의 인지는 4년제가 더 우위에 있는 것은 맞습니다.

2년제 대학교의 수업은 4년제의 학교보단 확실히 질적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셔야 하는 것은, 잘나가는 전문대는 왠만한 4년제 대학교보다 좋습니다.

여기에 첨언하자면, 2년제 대학 나온 사람과 4년제 대학 나온 사람은 진급이 차이가 나고 봉급이 차이가 난다고는 합니다만.

 

마지막으로 종합하자면,

대학교는 단지 취업의 관문이라는 성격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전국에 수많은 대학교가 있죠.

소위 말하는 SKY, 넓게는 인서울 의 대학교가 아닌 학교들은 특출나게 높은 점수를 요구하는 의대같은 것을 제외하면,

솔직히 거기서 거기입니다.

취업, 사실은 정말 어려운 문제입니다.

대학교라는 명찰, 4년제 대학교라는 졸업장이 이제는 안먹히는 시대가 되었죠.

이렇게 얘기하면 격할지 모르지만,'개나 소나' 4년제 대학교를 다니는 시절이기 때문에

거기서 거기인 4년제 대학을 나와서는, 정말 취업하기가 힘든게 사실입니다.

발상을 전환하면, 차라리 취업률이 좋은 2년제 대학을 일찍 졸업하여 남들보다 빨리 취업하여 사회 노동력에 이바지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건 개인의 선택 문제입니다.

4년제 대학교 나와서 취업 절대로 못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2년제 대학 나오면 100프로 취업한다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모든 문제는 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다는 점을 명심하시면서,

이렇게 글을 끝맺겠습니다.

 

' 모든 출구는 어딘가로 들어가는 입구다 ' - 최인철 '프레임'

 

 

* 추신 : 제 주위의 사람들 중에서 대학교를 안나왔는데도 불구하고, 공무원을 하고 있는 친구도 있고, 삼성전자에서 일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군대에서 만났던 선임은, 공고를 나와 자동차 엔지니어로 일을 했었는데요. 능력이 너무 출중하다보니 전역즈음에 부대에 스카우터도 오고 그랬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당시 패전국이었던 독일에서는 11월 혁명이 일어납니다. 11월 혁명으로 독일 제국은 무너지게 되고 사회민주당에 의해서 공화국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공화국의 선포는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이유에서인지 과거에는 전혀 존재치 않았던 여러 개혁적인 법률들을 개정하여 현대 사회의 법학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국가이죠. 하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은 그 태생적 한계 - 군부에서 패전의 책임을 떠넘기는 식으로 사민당에 의해 탄생하게 되는 - 때문에 국가의 존속이 무척이나 짧습니다. 고작 해봤자 14년 정도 존속한 국가입니다. 이후 여러분이 잘 아시는 나치당이 정권을 잡고 히틀러를 총통으로 하는 새로운 독일 제국의 탄생으로 그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 바이마르 공화국이 역사의 일부분에서 가지는 의미는 무척 미미합니다. 하지만 앞서 밝혔듯 법학에서 무척 중요한 위치, 혹은 의미를 가지는 국가입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바이마르 헌법인데 이 바이마르 헌법을 보면 참 재미있는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이마르 헌법은 이전의 헌법들과는 달리 사회주의적 효과도 함께 포함하고 있는데요, 보통 그 이유로 이야기 하는 것은 당시에 러시아에서 대대적인 사회주의 혁명으로 사회국가적 이념들이 함께 포함되었다고 이야기하는 편입니다. 근대의 헌법사에서 사회권, 생존권, 재산권 행사의 공공복리성을 규정하게 되면서 20세기 헌법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사실 어찌보면 바이마르 공화국 자체는 무척 약한 국가입니다. 물론 패전의 영향으로 엄청난 인프레이션을 겪고 거리에는 실업자로 넘쳐났죠. 법률로 생존권을 이야기해도 실상 국가 자체의 존속 자체가 위태한 것도 사실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국민들을 하나로 묶고 응집할 결집력이 부족했죠. 그래서 이후에 등장하는 나치스의 수당인 히틀러가 쉽게 총통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고 했나요? 그래서 독일은 나치스의 깃발아래에 하나로 뭉치게 되었죠.

  그래서 법학에서는 독일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큽니다. 특히나 법학개론이나 생활과 법률같은 대학교 교양 강의에서나 고등학교 법과 사회 과목에도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이 이 '바이마르 공화국' 혹은 '바이마르 헌법' 이죠. 법학을 전공하다보면 정말 흥미로운 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국가에서 다른 나라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규정들을 만들었는가 싶죠. 학문이라는 것은 어느날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물론 옛날부터 사회권에 대한 법률적 논의와 학문적 대립이 존재했었고 그 아래에서 지금의 법률이 존재하는 것입니다만, 그리고 그 바이마르 공화국이 좀 더 오래 존속하여 나치와 히틀러를 만들어내지 않았더라면, 정말 독일이라는 국가가 대단했을 거라고 상상해보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내가 이 소설을 첨 읽었던건 한창 소설을 읽을 때 (나는 사실 책을 읽는 것을 수능 공부의 일환으로 했었다.. 그래서 망했지만), 고등학교 1학년때 인 것 같다. 글읽기 용으로 썼던 Zess Plus 라는 PDA도 아닌 PDA로 텍스트를 읽었는데, 그 때 어쩌다가 읽었던 책이 당신들의 천국이었다. - 나는 이때 은하영웅전설이라는 일본 소설도 읽었는데, 아.. 이것도 명작이더라.. -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판타지 소설이나 조금 읽을 줄 알았던 때라 우리나라의 근대 소설에 대한, 사실은 조금은 재미없겠지 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뭐랄까 당신들의 천국은 꽤 장편의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소설이었다. 소록도에서 펼쳐지는 조백헌 원장과 원생들의 대립구도가 점차 화해구도로 바뀌고 거기서 더 나아가 이상욱이 말하는 마음에 '동상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던 조백헌 원장이 결국에는 또다른 동상을 지으면서 - 참 이 소설에서는 동상이라는 의미가 엄청난 의미를 내포한다. 이 한마디로 설명이 가능하니. - 소록도가 소록도의 주민이라 할 수 있는 원생들의 천국이 아닌, 몸이 성하고 바깥에서 들어온 '우리들의 천국' 즉, 원생들에게선 '당신들의 천국' 이 되어버린다.

  오랜만에 당신들의 천국을 다시 읽어본다. 나는 이 소설을 한 5번 정도 새로 읽어보았다. 책 내용이 너무 좋아 활자로도 보고 텍스트로도 본다. 볼때마다 안에서 숨겨져 있던 구성요소들이 튀어나기 시작한다. 아.. 그래 이것이 한국 문학을 지탱하는 힘이었구나, 그리고 시시할 것만 같았던 옛날 소설들이 지금의 우리에게 감동과 재미를 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명작이라 불리는 것을 뼈져리게 느껴본다.


  요즘 엄청 이슈가 되는 이야기이죠. 군대에서 보급으로 지급하던 생필품을 없애고 대신 한달에 1830원을 지원하여, 그돈으로 병사에게 직접 생필품을 사게 한다는 육군의 새로운 보급방침입니다. 이 이야기는 군대 연초를 없애는 것과 함께 논의되어 온 사항이죠. 
  제가 2년동안 느끼고 나온 군대에서의 행정이란 어느 공공기관보다 빠르게 변하는 혁신의 공간입니다. 물론 이것이 좋은 의미에서의 혁신보다는 나쁜의미에서의 혁신일 경우가 많고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의 행정이 많은 것이 사실이나 그것은 어찌보면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모든 공공기관들이 저지르는 똑같은 일이니까 넘어가더라도, 사실 군대라는 곳이 정말 정적이고 변화가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곳에서의 행정은 정말 하루하루 틀리게 바뀌고 또 바뀝니다.
  가령 예로 들면 병사들의 피복이 많이 부족한 현실을 수정하여, 원래 동계 2벌 하계 1벌을 지급하던 방식에서 (여기에서 병사들은 동계 1벌을 A급이라고 하여 휴가때만 입는 전투복으로 아껴둡니다.) 동계 2벌 하계 2벌을 지급하고 활동복도 기존 하계 1벌을 2벌로 늘리는 등, 많이 바뀌려고 노력하는 편이죠. 어찌보면 정말 다른 공공기관보다 의견수렴이 잘되고 행정또한 좋은쪽으로 쉽게 바뀌는 곳이 군대입니다만, 이번 생필품 값으로 1380원을 지급한다는 것은 좀 너무하다 싶기도 하죠.

  하지만 군대 안다녀 오신 분들은 모르는 얘기입니다. 옛날에 군대를 전역하신 분들도 잘 이해가 안되시는 겁니다. 최근에 군대를 전역한 분들은 아실겁니다. 군대에서 보급해주는 '세면백' 에서 부터 '세면비누' '세탁비누' '세탁기용 가루비누' '휴지' '면도날' '치약' '칫솔' 중에서 재대로 쓰는 거라곤 세면백, 휴지, 면도날, 치약, 칫솔 뿐입니다. 물론 이것도 나중에는 '사제물품' 이라고 해서 휴가때나 충성마트에서 자기가 쓰고 싶은 폼클렌징이나, 면도기, 치솔, 치약, 심지어 세면백 마저 사제로 사용하는 실정입니다.
  옛날에 군대 다녀오신 분들은 참 어이가 없으실겁니다. 이런거 쓰실 엄두도 못내셨겠지요. 하지만 지금 군대의 실상이 그렇습니다. 이등병때부터 폼클렌징 사용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또 이것을 충성마트에서도 모두 팔기때문에 병사들도 큰 어려움 없이 월급으로 구매하여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제물품을 쓰면서 남는 보급품들은 어떻게 될까요? 아마 육군 아무게 부대 내무실이나 화장실을 가시면 쓰지 못해서 쌓아놓고 있는 모습을 보실 수 있을겁니다. 아니면 보급창고라도 가면 넘쳐납니다.
  왜 이것은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는지요? 참 무조건적으로 육군의 탁상행정이라고만 몰아가는 것도 참 어이가 없을 지경입니다. 물론 1380원이라는 돈이 초등학생 1학년 하루 용돈도 안되는 돈임에는 틀림 없고 이 돈의 양은 너무 부족하다 생각되지만, 실제 육군의 내부 사정도 모르고 그냥 좋다고 공격만 하는 사람들과 신문사들을 보면서 이것만은 좀 알았으면 좋겠다 싶네요.

  저는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번 육군의 병사의 생필품 직접 구매에 대해 찬성합니다. 저도 육군 병장으로 만기제대 한 사람으로써 아무렇게 쓰여지고 버려지는 비누와 생필품들을 보면서 직접 구매하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많습니다. 저도 물론 보급품 거의 안썼구요. 이건 실제 일어나는 낭비를 줄이겠다는 육군의 계산이지 병사들을 이해못하고 말려 죽이겠다는 속샘은 절대로 아니라는 점 알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1380원이라는 돈은 너무 적고 늘리면 괜찮지 않겠나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