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용

1. 평등과 불평등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민주 공화국은 공화국의 분류에서도 국민에게 주권을 부여하는 국가로, 귀족·계급 공화국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 민주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귀족이나 계급을 부정하는 모두가 평등한 사회라는 것이다. 이는 곧 헌법 제 111항의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조항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근거가 된다. 요체는 평등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이다. 이 문구가 가지는 함의는 재미있다. 국민은 법 뒤에서는 불평등 할 수 있다는 것. 정치·법적 평등은 존재하나 경제·사회적 평등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실제로 우리 대한민국의 사회는 불평등하다. 최근에 이슈가 되었던 문제를 예로 들면, 5급의 국가고시에서 시험을 쳐서 합격하는 고시형태를 줄이고 특채를 늘린 것이다. 실상 이는 단지 통과용으로만 이용되던 국가고시의 비효율성을 없애고 보다 효율적으로, 이미 회사에서는 통용되는 특채형태의 인원을 충원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명환 외교부장관 딸의 특채사건으로 사회적 파장으로까지 퍼지게 되었다. 이런 사건들을 보면서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된다고. 이런 말이 내포하는 의미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우리들은 암묵적으로 인정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소득분배의 불균형을 매년 통계청에서 수치를 내는데 그 수치는 다음과 같다.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09년도에는 낮아졌다곤 하지만 그 낙차가 미세하므로 매년 증가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불평등이라는 인식은 결국 불평등한 현실의 발현으로 이어진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매사가 긍정해지고 부정적 생각을 하면 매사가 부정적이 듯, 불평등하다 믿을수록 사회는 진짜 불평등하게 바뀌어 간다. 깊게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긴 하나, 실재하는 불평등이 불평등을 만드는 것인지 아니면 불평등하다 믿는 것이 불평등을 만드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이것이 아비투스의 개념이기도 하다.)

 

2. 아비투스

 

맑스에 의해 정초된 계급이론에서 계급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와 소유하지 못한 자로 자본가계급과 프롤레타리아계급을 형성하게 되고 양 계급 간에 착취-피착취의 관계가 형성된다고 본다. 베버는 이와 달리 경제적 요인에 의한 계급, 사회적, 문화적 차원의 신분집단 혹은 지위, 정치적·권력적 차원에서 파당을 통해서 계급이 분화된다고 본다. 부르디외는 이 두 학자의 고전적인 계급의 개념에 구별되는 아비투스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아비투스란 인간행위를 생산하는 무의식적 성향으로, 사회적 행위 주체의 행동원칙을 결정하는 일련의 획득된 기질 혹은 성향이라고도 한다. 부르디외가 표현하는 아비투스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아비투스는 지속적이면서 전환이 가능한 성향들의 체계이다. 그런데 아비투스는 과거의 모든 경험들을 통합하면서 매순간마다 인지, 평가와 행위의 주형으로 기능한다. 아비투스는 또한 동일한 형태의 문제들을 해결하게 하는 틀의 유사한 이동과 실천의 결과에 의해 변증법적으로 생산되고 얻어진 다음 결과들이 지속적 교정에 기초하여 수없이 분화된 임무의 수행을 가능하게 한다., 아비투스란 특정한 사회적 환경에 의해 획득된 성향, 사고, 인지, 판단과 행동의 체계라고 한다. 이는 단순히 사회 환경에 의한 사고와 행위를 재생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갖는다고 한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아비투스를 전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인과 소작농 관계로 표현하는데, 주인이 소작농을 잡아두기 위해 단순한 물리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 주인과 소작농의 신의 관계에서 주인은 이를 유지하기 위해 명예에 호소하고 더 나아가 소작농에게 자신의 이익 일부를 양보하기까지 하게 된다. 이러한 지배양식의 궁극적인 토대는 사회구조의 문제가 아닌 개인 간의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부르디외의 주장이다. 앞서 밝힌 맑스나 베버의 경제적 생산관계를 통한 권력의 형성과는 확연한 차이점을 보이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사회학에서 매우 중요한 학자로 상징적 폭력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 상징적 폭력은 집단적 오인, 형태화하기, 상징적 연금술의 특징을 가지게 되어 피지배자의 복속을 끌어내는 것을 전제로 한 지배의 양태로 설명한다. 이때 피지배자는 이런 복속의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게 되고 그 이유는 폭력의 효과가 사회적으로 주입된 믿음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결국 상징적 폭력으로 전개되는 사회적 현상들은 모두 아비투스를 지칭하는 하위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아비투스는 육체의 사회적 사용을 구성하여 지배양태를 결정짓는 기초로, 또한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는 육체적 행동의 결과물로 파악하고 있다.

어쨌거나 부르디외의 아비투스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취향의 문제로, 어떤 옷을 입을 것인지 어떤 음악을 들을 것인지에 대한 개인적인 문제는 사실 계급적 질서를 반영하여, 취향은 결국 계급을 표현해주고 지배적 위치에 있는 집단이 아비투스를 매개로 피지배집단에 상징적 폭력을 행사하고 그를 통해 지배의 정당화와 질서를 유지시키게 된다. 지배자는 자신들의 취향과 사고의 무의식적 취향 혹은 습속을 보편적이고 우월하고 고상한 것으로 드러내어 피지배자의 취향 혹은 습속을 저급하고 추하고 열등한 것으로 인식시키게 된다. 이를 통해 인식을 자연스럽게 관철시키고, 피지배자를 지배자에 복속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3. 아비투스와 불평등

 

서두에서 밝혔 듯, ‘안될 놈은 안 된다는 인식, 더 나아가 못 배운 게 한이 되거나 백 없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인식은 개인적인 문제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전반의 매커니즘내에서 학벌(학력자본), 집안(상징자본), 연줄(사회관계 자본)의 관계성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일정 시점에서 개인이 가지게 되는 학력 자본은 출신 가정의 경제적 수준을 나타내고 주로 상속되는 문화자본의 양과 학교교육 제도에 대한 투자경향 (과외나 학원 따위의) 크기에 따라 결정되고 교육기관에서는 문화자본이 가장 풍부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학교적인 위계를 높이려는 경향을 보인다. , 교육이 인성의 형성을 목표로 한다는 다소 휴머니즘적인 이상과 달리 실제로는 계급, 계층을 차별적으로 생산해내려는 도구라는 것이다.

평등에는 흔히 두 가지의 종류가 있다고 한다. 결과의 평등, 기회의 평등이 그것이다. 결과의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모두가 기회의 평등에 고개를 끄덕인다. 다만 여기에서 매우 큰 함정이 존재하는데, 기회의 평등 -업적주의- 가 보장되었는데 그 결과론적으로 불평등한 것은 정당하다고 보는 것이다. 앞서의 아비투스는 기회의 평등이란 존재하지 않는, 오히려 기회의 불평등이 제도화되어있음을 암시적으로 나타낸다. 불평등의 예로 부르디외가 소개하는 것은 전쟁을 통해 농촌사회에서 결혼관습을 지배하던 경제적 요인이 달라졌고 돈이 없어 장가를 못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물에 걸맞는 세련된 몸짓, 부드러운 말투, 유행에 민감한 옷차림이 부족하여 장가를 못가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아비투스는 사회전반의 메커니즘에서 작용하여 도시와 농촌에서 태어나는 각각의 사람에게 기회의 평등이 아닌 기회의 불평등을 야기하게 된다. 불평등은 제도로써도 발생하지만 우리 내제적인 관습(습속)을 통해서 발생한다는 사실. 참 재미있는 발상의 전환이다.

 

4. 한국의 아비투스

 

(1) 한국의 아비투스

 

한국의 사회학에서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논의를 수용하는 것은 더욱 조심스러워야 할 필요가 있다. 부르디외의 논의가 프랑스 사회의 문화적 배경을 토대로 하고 있고, 프랑tm 사회는 계급에 따른 일상생활의 차이가 뚜렷하고, 가족생활을 중심으로 일상생활이 이루어짐으로써 가족문화를 통한 계급문화의 형성과 구별 짓기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반면 한국사회는 프랑스와 같이 오랜 기간을 두고 형성된 가족중심의 계급 문화는 아직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가정에서 가장은 회사형 인간으로 기업 중심의 생활이 이루어지면서 가족생활은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가족 단위의 독특한 문화적 소비와 취향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부르디외의 논의는 좀 더 조심스럽게 수용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경제적 불평등

 

우리나라는 97IMF 위기 전까지 무척이나 지속적이고 빠른 경제성장을 보여왔다. 외환위기로 경제공황을 경험한 우리나라는 수많은 중소기업이 도산하고 대기업도 대량 감원과 구조조정을 통해 조직의 변화를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전문직 혹은 관리직 중간계급도 고용상 지위를 위협받으며 중산층 위기론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는데, 중산층이 가지는 위치는 상대적으로 높은 소득과 고용안정을 누리는 계급이었다. 중산층이 사라지게 됨으로 우리나라는 양극화현상을 빗게 되었다. 사실상 외환위기로 실업자가 된 사람은 중산층보다는 노동자계급에 몰려있었고 우리나라의 불평등 재생산이라는 측면을 더욱 가속화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노동자 계급의 자손들은 그들의 취향이나 소비양식 등으로 나타나는 상징적 능력이 학습능력의 차이로 전환되며 학업성취에서 계급별 차이를 만들어낸다. , 못난 놈에게 못난 자식이 생산되는 것이다. <합리적> 경제 앞에서 그리고 <합리성> 앞에서의 불평등, 또는 경제적 태도의 변화에서의 불균등한 리듬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의 반영이라는 사실이다.라는 부르디외의 말처럼 합리적인 경제가 가지는 합리적인 평등이 실상 불평등하다는 사실을 보며 한국경제에서도 충분히 불평등의 아비투스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성적 불평등

 

남성적 지배는 가족관계나 결혼, 주체와 객체, 주인과 수단이라는 사회적 인식을 통해 구성되어 남녀의 불평등이라는 지배관계를 성립한다. 시간의 관념에서 과거로부터 지속되어 이어지는 인식의 태도에서, 한국사회는 이러한 성적 불평등이 가장 강력한 아비투스로 기능해왔다. 물론 후기자본주의사회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경향은 사회구조적으로 많이 개편되고는 있지만, 아비투스의 구조화된 구조그리고 구조화하려는 경향을 탈피하지는 못한다. 즉 여전히 남녀차별의 아비투스는 구조화되어있고 또한 구조화하려는 경향 때문에 불평등을 계속해서 재생산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의 사회적 매커니즘의 작용은 은연 중에 표출되어 남성 스스로도 여성을 차별하는지 모르고 여성 스스로도 남성이 여성을 차별하는지 모르는 사태가 발생한다. 물론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불평등은 해소되고 어느 일정부분에 있어는 오히려 역차별적인 행태가 나타나긴 하지만 이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깔린 것으로 우리의 아비투스를 깨뜨리진 못한다.

 

(4) 남북관계와 아비투스

 

남북관계는 아직까지 대립각으로 우적(友敵)의 구분이라는 이분법 논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관료들의 경직된 사고방식, 자유주의와 주체사상의 이데올로기 대립, 남한에서는 훕수통일에 대한 바람, 더 나아가 흡수통일의 논리에 경제논리가 기초되어 남한이 북한보다 앞서 있다는 보이지 않는 우월감이 작동한다. 또한 우리는 현대 대한민국에 이르기 까지 적국인 북한에 대한 반공이미지를 국가적 차원에서 만들어갔다. 일상생활에 침투해 있는 매스미디어의 조작, 언어의 관행은 북한에 대한 강경 이미지를 재생산하고,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서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작용하여 오히려 북한에 대한 동지의식보다는 적으로 구분하는 분단의 언어를 생산한다. 분단국가라는 특수성으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현재 정부에서 행하는 일련의 정책들이 이러한 북한에의 아비투스를 생산하게 되었고 이 문제는 어쩌면 우리나라에 팽배한 좌-우익의 논쟁에서 파생되어 발생한 것일 지도 모른다. 정권이 보수적인 집단이 차지하게 되면, 사회는 북한을 옹호하거나 진보적이면 빨갱이로 매도하는 식의 아비투스를 양산하는 정책들을 펼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보수집단의 정치권력을 유지하는 방식이고, 마찬가지로 진보집단이 정치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으로도 사용된다. 우리나라는 대대로 보수적인 집단에 의해서 지배되어왔고 그로인해 수십년에 걸친 북한에 대한 아비투스가 전수되어 온 것이다.

5. 아비투스의 극복

 

사회 경제적 전반적인 계급성은 치자와 피치자간 약탈의 형태로써 지배를 한다는 것과 당한다는 것이 단순히 사회 구조적 문제만이 불평등을 야기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비투스를 알아가면서 우리 육체 내에 각인 되어 버린 스스로를 구속하는 불평등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도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언제나 사회학의 결론은 사회란 결코 하나, 두 개의 개념으로써는 도통 설명할 수 없는것이 때문에 맑스나 베버의 계급론이나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베르크손의 창조적 진화론 등 복합적으로 야기되는 것이다.

부르디외의 입장에서의 아비투스 극복은 불가능에 가깝다. 부르디외는 혁명이라는 의식이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전제된 경우에만 비로소 움트기 시작한다는, 현재가 경제적으로 철저히 박탈당한 소외 상태에서 미래란 아무 것도 보장 할 수 없는 처참한 상태의 연속으로 인식되어 그 상태에 빠진 계급의 혁명 의식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경제적 상태가 사회적 모순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의식마저 박탈당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부르디외는 아비투스의 개념을 부정적인 의미에서 사용하였으나, 긍정적 입장에서 사회 질서유지를 위한 일상생활의 행위패턴이기도 한 아비투스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게 되면 사람들 간에 평판이 일상생활의 행위 패턴을 규정하는데 중요하게 작동하게 되어 법이나 물리적 강제 이외에도 사회질서를 생성하고 유지시키는 보다 근본적인 기제 -규범-로써 작용한다는 견지도 존재한다. 결국 문제는 문화, 사회, 경제 등을 거쳐 인간 문제로 귀결된다.

정말 어려운 문제이다. 어쩌면 사회학에서 계급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가장 큰 고민이 아닐까 싶다.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서는 계급을 타파해야할 것이고, 계급을 없애는 것이 정말로 가능할 것인가? 계급의 발생은 어떻게 보면 자연적인 것일 지도 모른다. 가장 원초적인 동물의 세계에서도 그들을 통제하는 우두머리가 존재하고 먹이를 많이 먹는 동물이나 먹이를 많이 못 먹는 동물이 생기게 된다. 그렇다면 자연 발생적인 계급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인가? 인간은 생각이 있는 동물이다. 또한 서로 대화하고 이해할 수 있는 동물이다. 사실상의 계급을 없앨 수는 없어도 그 격차는 충분히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보편이성처럼 인간은 합리성에 근거한 이성을 가지고 서로 부정의 아비투스를 없애 나갈 수 있다. 그것이 실상 무의식의 발현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찾고 고치려는 이성에 근거한 노력들은 결국에는 인간에게 보다 평등에 가까운 사회를 선물할 것이다.

 

 

참고문헌

홍성민, 2000, <문화와 아비투스, 부르디외와 유럽정치사상>, 나남출판

양은경 5, 2002, <문화와 계급, 부르디외와 한국사회>, 동문선

파트리스 보네위츠, 2000, <부르디외 사회학입문>, 동문선

신광영, <한국의 계급과 불평등>, 을유문화사

피에르 부르디외, 1995, <자본주의의 아비투스-알제리의 모순>, 동문선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 새물결

 

 

 

*  예전 과제를 할 때 작성했던 문서로 아비투스라는 말의 의미를 나름 정리해본 것이며, 이 내용이 정확하다고는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단지 제 생각에 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