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용

※ 의도치 않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들어가며

  삶이라는 것은 때로는 나에게 힘겨운 일이 되기도 한다. 어떨 때에는 정말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때도 있고, 어떤 때에는 한없이 즐겁기만 하다.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그 뜻 그대로 인생을 꾸려나가는 것에 있다. 하지만 어찌 인생이 내 마음대로 이루어질 것인가? 흘러가는대로 살아가다보면 어느 순간 삶은 그저 꾸려나간 것이 아니라 살아 나간 것이다.

  과거 많은 철학자들이 사람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 왔다. 사람은 어디서 왔고, 어떻게 생겼으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 말이다. 현재 수억의 지구 인구 전체는 똑같은 고민을 한번이라도 해 보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논제는 역사 속에서 단 한번도 해결된 적이 없다. 나에게 삶은 어떤가? 30이 넘어 어느덧 서른 중반을 치닷는 지금은 나는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떠한 삶을 살게 될 것이며,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그러한 고민에 빠질 때면, 나는 가끔 퀸이 생각난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누구나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각자의 이유로 가지고 산다. 나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바로 추억에 있다. 퀸은 나에게 추억과 같은 밴드이다. 현실적으로 내가 노래를 듣기 시작할 때에는 프레디 머큐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들의 전성기를 직접 눈으로 보고 들었던 사람은 아니다. 다만 밴드 음악에 한창 심취해 있던 무렵, 퀸은 나에게 충격적인 경험과 추억을 가져다 주었다. 특히 보헤미안 랩소디를 처음 들었을 때의 그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신기한, 아니 더 극한으로 표현하여 이상하기 그지 없는 음악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 없이 듣게 만드는 마법같은 힘이 있는 이 노래는 과연 뉘가 만들었던가. 그렇게 퀸 노래는 내 삶의, 추억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내 삶의 이유 중 하나로 가끔 꺼내어 다시 들어보는 추억이 되었다.


STILLCUT

정말 무서운 싱크로율을 자랑하는 배우들. 근데 솔직히 그게 끝이었음.


2.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나는 영화를 꽤 많이 챙겨보는 편이다. 물론 평론가나 전문가 만큼은 못하겠지만 일반인 수준보다 많이 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다보니 영화를 보면서 돈이 아까운 영화인지 아닌지 많이 생각해보게 되는데,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한마디로 말하면, 근래 본 돈 아깝지 않은 영화였다. 하지만 잘만든 영화인가 하는 질문에서는 아니라고 답할 수 밖에 없는 영화이다.



POSTER



  영화의 단점 첫번째, 이 영화에는 악역도 선역도 없다는 것이다. 프레디 머큐리의 생이 그렇게 끝이 났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며, 실제 존재했던, 불과 몇 년전 (10여년이 지났지만) 만 하더라도 생존해 있던 사람을 표현하다 보니, 영화의 표현과 스토리가 단순해 질 수 밖에 없다.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하면서, 주인공 외의 인물을 전부 실존 인물로 채우고 실제 있었던 사건을 나열하면 그것은 영화가 아니라 다큐맨터리가 된다.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날 과거 이야기에서는 누군가는 영화를 통해 이미지가 나빠져 한편으로 소송의 우려도 심해진다. 단적인 예로, 최근 개봉하였던 암수살인이라는 영화에서 논란이 되었던 것 처럼 말이다. (비유가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다보니 영화는 등장인물들을 악역과 선역의 모호한 선상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덕분에 영화는 누구하나 두드러지는 사람 없이 그냥 저냥인 인물들로 가득 차 있다. - 프레디 머큐리를 제외하면 말이다. 단 한명의 악역도 없다고 말 할 수는 없겠지만, 뚜렷한 악역이라고 할 만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이 영화가 지닌 치명적인 문제이다. 

  영화의 단점 두번째, 스토리의 너저분함이다. 전형적인 서부극, 돌아온 탕야 - 주인공이 천재성 혹은 성공을 이룩하다가, 무엇인가의 유혹에 넘어가 한때 타락하여 귀중한 것 (가족이나 애인)을 잊고 살다가 귀중함을 깨닫고 돌아간다는 스토리를 그대로 답습함과 동시에, 노래도 해야겠다, 프레디 머큐리 이야기도 좀 해야겠다 많은 것을 이루려다 보니 스토리는 생략과 비약으로 너저분하기만 하다. 그들의 음악이 세계에서 어떻게 해서 성공하게 되었는지, 혹은 그 성공의 규모 척도를 알 수 있는 수준의 내용을 첨가하였더라도 이렇게 너저분하게 보이진 않을 것이다. 스포일러를 곁들이자면, 미국에서 성공하게 되었다는 것이 전화 한 통화로 그랬다더라 하면서 어물쩡 넘어가는 모습에서 개탄을 금치 못하였다.


3. 그럼에도 이 영화는 가치있는 영화이다.

  이 영화를 일컬어 퀸 팬들을 위한, 헌정 영화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진짜 가치는 퀸을 모르는 사람이 퀸의 음악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알게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조용한 영화관에서 어깨를 들썩이게 하고 리듬을 타게하고, 이것이 전설이라 불리는 밴드, 퀸의 음악이다. 이 영화가 가지는 가치는 영화로서의 가치가 아니라 퀸의 음악으로서의 가치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 바로 이러한 점이었다. 퀸이라는 밴드 위치가 정말로 전설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영화 자체가 퀸이라는 이름에 주눅이 든 꼴이었다.

  스토리가 너저분하고 허점이 너무나 많고 영화로서 수준이 많이 떨어지는 영화임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아 스토리가 뭐 이래 라고 한탄하면서도 모든 것이 용서되는 사실은, 영화에서 나오는 모든 노래가 퀸의 노래였다는 것이다. 마치 퀸의 노래가 모든 것을 용서하게 만들어 준다고 하여야 할까. 그래서 나는 대단히 만족하면서 영화관을 나왔다. 그리고 누구나들처럼, 유튜브를 켜서, LIVE AID 영상을 또 다시 틀어 보았다. 놀라왔던 것은 정말 영화에서 똑같이 재현하려고 노력했고 성공했구나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든 생각, 또 한번 더 보고싶다 (영화가 아니라 이 영화에 나오는 음악 장면들을 - LIVE AID를)


여담1. 난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많이 흘리는 편인데, 딱 두번 눈물이 흐를 뻔 했다. 첫 번째는 프레디 머큐리가 동료들 앞에서 자신의 지병을 밝히면서 연설을 할 때였고, 두번째는 LIVE AID 공연장을 들어가면서 몸을 푸는 모습을 보면서다. 근데 정말 LIVE AID 장면은 터져나오는 감탄사를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여담2. 글쓰는게 취미라고 몇개의 블로그를 만들었다가 안쓰고하다가 또 다시 취미 살려보려고 최근에 감명 깊었던 영화 리뷰 첫글로 써봅니다. 담부터 쓰고싶은거 많이 올려보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블로그가 취미기 때문에 광고같은거 올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광고주 분들 보시라고 쓴글이 아니라, 광고 배너 같은거 안넣으니 부담가지지 마시라고..) 그리고 오랜만에 쓰니 영화처럼 내 글도 중구난방이네요.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들어가면서
 

  


  2009년, 기축년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작년 광우병 파동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여파로 우리나라에서 소를 길러서 파시는 분들의 한숨소리만 가득한데요, 와중에 참 선물같은 영화한편이 개봉했습니다.
  워낭소리는  2008년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피프 메세나 상을 수상한 작품이었습니다. 피프 메세나 상은 다큐멘터리 부분에서 상을 주는 부문인데, 그때 관객들은 모두 울었다는 후담이 전해지죠. 그정도로 사실 워낭소리는 입소문이 은근한 영화였습니다. 저도 참 많이 보고싶었었는데 지방에 사는 지라 독립영화를 보기는 무척 힘이 들었지요. 와중에 일반 극장에서도 상영한다고 했을 때에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일반 상영이긴 한데, 극장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보통 수도권 중심이나 독립 영화를 상영해주는 작은 상영관에서나 볼 수 있었습니다. 기다리다 지쳐버린 저는 제가 사는 창원에서 그나마 가까운 '진주' 에서 보기로 마음먹었죠. 하지만 여기서 이 영화의 반전이 한번 일어납니다. 작게나마 일반 극장에서 상영하던 워낭소리가 연일 매진사례를 보여주면서 일반 상영하던 CGV 측에서 확대 상영하기로 결정 했습니다. 물론 CGV의 무비 꼴라주라고, 역시 작은 영화를 보여주는 상영관이 있는 곳에서 한정해서 개봉하였는데 창원 CGV가 당당히 포함되어 덕분에 창원에서 이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영화는 요즘 흔히 나오는 영화처럼 화려한 CG나 엄청난 반전, 그리고 충격적인 결말이 있는 영화는 아닙니다.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영화의 연결성, 혹은 편집이 무척 낯설게 느껴집니다. 물론 우리가 이런 독립 영화에 익숙치 못한 것이기 때문이겠지만 그렇게 담백한 맛이 나게 편집을 한 편은 아니었거든요. 뭐랄까 궃이 표현해보자면 워낭소리는 어머니의 재래식 구수한 된장국 같고 요즘 나오는 영화들은 MSG 가 첨가된 인스턴트 식품 같은 느낌으로 표현하면 적당할까요? 우리가 우리의 한국의 것, 한국의 맛을 이야기 하지만 정작 우리가 '한국의' 것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할까요?



  한국의 맛, 혹은 한국적인 것

   

  이제는 촌스러운 옛날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황토방의 뜨듯한 온돌 위에서 잠을 자고, 수박 서리를 하다가 쩌억 갈라서 먹던 그 시원한 맛하며, 논에서 건져올린 미꾸리로 추어탕도 끓여먹고 하던 것들이죠. 저에게도 이젠 흘러가버린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들이 이 영화를 보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우리의 옛 이야기가 이제는 낯섬으로 다가오는 시점입니다. 할아버지가 주인공인 일소를 데리고 옛날 방식 그대로 논을 일구고 모를 심는 모습을 보면서 이게 우리의 옛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참 낯설게 느껴집니다. 
  참 뜨악하는 생각입니다. 분명 우리의 것인데 이 낯섬으로 인해서 이 영화는 한층 더 재미있는 영화가 됩니다. 나이가 조금 드신 분들에겐 옛날에 저렇게 농사를 지었었지 하는 감회가, 어린이들에게는 소가 먹을 거리뿐만 아니라 일하는 소이기도 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체험 하는 기회가 되지요.
  참으로 한국적인 것으로 물들어 있는 영화입니다. '소'가 먹을 것이기 때문에 농약을 절대로 치지 않는 농사를 짓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우리는 또 우리네의 아버지들을 한번 생각합니다. 그리고 진짜 한국적이었던,
'항상 내 자신보다 남을 먼저 배려할 줄 알았던' 우리네의 옛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참 많이 의미있는 영화입니다. 궃이 교육적인 내용이 있으니까, 라는 수식어는 필요 없습니다. 원래는 보통이고 평범이던 일상생활들이 낯설게 하기로 한국인의 저 내면속에 잠자고 있던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그리고 고향에서 힘들게 농사를 지으시는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항상 자식들을 생각하시면서 당신의 몸을 아낌없이 희생하시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전화 한통화 하게 만드네요.






영상미가 주는 우아함이란


  사실 워낭소리의 영상은 더하거나 빼는 부분이 없습니다. 보면, 그저 할아버지와 소가 함께하는 장면 투성이지요. 이런 장면들에 대사도 없고 나레이션도 없습니다. 그저 평온한, 혹은 성한 곳 없는 몸을 이끌고 일을 하는 소와 할아버지의 모습일 뿐입니다. 마치 감독은, 이 영화에, 이런 장면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냐고 말하는 듯 하네요. 그래서 우리는 소와 할아버지, 그리고 할머니의 서로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워낭소리가 그저 할아버지와 소와 할머니의 이야기 일 뿐이라면 큰 오산입니다. 감독은 은연중에 하고싶은 이야기들을 영상으로 보여줍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는 역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시내에 내려와서 우마차를 타고 가다가 시장 입구에서 '광우병 소는 물러가라'고 시위하는 사람들 앞을 지나가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만들죠.







  그렇게 감독은 영화에서 단순히 보여주는 영상으로도 자신이 하고싶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처음에 참으로 투박하게 보여지던 영상들이 후반부에 가면 갈수록 영상미를 더해갑니다. 마치 한폭의 수체화를 보는 것 처럼 아름다운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초반부에 아리송했던 영상들이 후반부에 할아버지의 소에 대한 애정과 더해져서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CG로 도배하고 특수효과가 빵빵한 영화보다 훨씬 영상미가 우아합니다. 촬영팀의 고생이 눈에 선할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들도 많습니다. 이 영화가 단순히 소의 죽음으로 슬픈 영화만이 아니라, 눈으로도 보고 즐길거리가 많은 영화입니다. 
  촬영팀들이 잡은 아름다운 장면들도 눈에 새기면서, 우리네의 시골들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닭게 됩니다. 왜 궃이 외국의 시골까지 찾아가서 외국 시골의 아름다움을 느껴야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워낭소리의 '봉화'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영상미가 주는 우아함이란, 오히려 우아하지 않아서 우아함을 뽐냅니다. 그리고 그것이 워낭소리라는 영화의 영상미 입니다.











이야기와 남겨진 것들





   그렇다고 이 영화가 그저 감동에만 촛점을 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 혹은 아버지 어머니의 삶이기도 한 두 분의 생활을 재미있게 풀어나가는데 좀 더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에 저와 같이갔던 친구도 처음에는 엄청 보기 부담스러워 했죠. 사실 다큐멘터리라 함은 예전부터 TV에서 보여주던 것들은 무척 권위적이고 딱딱한 것들이었습니다. 물론 요즘의 다큐멘터리는 형식도 많이 다양해지고 내용면에서도 참 많은 발전을 보여왔죠. 우리나라의 TV다큐멘터리가 사실 다소 딱딱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워낭소리는 그런 편견을 한번에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습니다. 편집은 최소화하면서 재미는 2배이상으로 올리는 방법으로, 할머니의 말과 역설적으로 보이는 할아버지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처음에 많이 긴장하고 왔던 (나름 다큐멘터리라고 해서) 관객들 모두 즐겁게 웃으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효과는 어린이들을 보면 재미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요즘 나오는 영화와는 틀리게 가족들과 함께보기에 참 좋기때문에 가족단위의 관객이 많습니다. 영화 시작 초기에는 아이들로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오히려 아이들이 더 집중해서 보는 방향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만큼 아이들에게도 충분히 어필 할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습니다. 태어나서 소로 논을 일구어 모심는 것 조차 한번 보지도 못한 아이들이 잘 이해도 안되는 할머니의 경상도 사투리를 해석해놓은 자막을 열심히도 쳐다보고 있죠. 




  그래서 영화란 참으로 크고도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어색했던 첫만남이 세월이 지나 갈수록 사랑으로 변하고 그리고 또 그 사랑이 우리의 행복으로 피어날 때처럼 워낭소리와의 첫만남이 영화를 보는 동안 어느새 할아버지와 할머니처럼 소를 사랑하게되고 그 사랑으로 인해 행복해집니다. 그것이 영화가 주는 위대한 힘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CG로 치장하고 그래픽으로 무장한 것들이 대단하더라도, 진실을 정말 진실되게 보여주는 것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또 진실이 주는 위대함일 것이니까요.  저는 워낭소리를 오랜만에 만나는 위대한 영화라고 감히 칭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소의 해를 맞이한 올해 2009년, 위대한 영화 한편 어떻습니까?

  저의 영화 감상문은 영화를 감상하신 분들을 위한 것입니다. 스포일러가 여과없이 존재하니 쌍화점 평가좀 보러 오셨다가 스포일러 당하는 일 없으시길 바랍니다. 뭐 개인적으로 스포일러라고 할만한 내용은 없습니다만 --;


  사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유하감독 작품중에서 별로 마음에 들어하는 작품도 없고, 이 작품은 처음부터 재미없는 냄새를 풀풀 풍기는 영화였거든요. 어쨌거나 저는 이 영화를 어제 봤습니다. 단 일말의 기대도 안하고 봤기때문에 영화 감상 후 느낌을 표현하자면, 뭐 생각 그대로 허접하네요.. 

  이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에 가장 이슈가 된 점은 조인성과 주진모의 동성애 장면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장면이 안나와서 엄청난 거부감을 가져오는 이슈는 아닙니다만.. 그래도 조금 거북하기는 거북하더군요. 현실에서 말조차도 꺼내기 힘든 주제인 동성애를 이런 극장에서 여과없이 보게되다니.. 어후.. 생각만해도 속이 거북하네요. (동성애가 나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전부 저런거 하는 건 아닐텐데 동성애를 표현하는 방법이 좀 잘못된 듯.) 
  어쨌거나 영화는 무척 단순합니다. 주진모는 동성애자, 조인성은 동성애자는 아닌데 주진모가 시켜서 그러는 척, 송지효는 동성애자인 남편을 둔 여자 (당연히 주진모와 송지효의 관계는 이름뿐인 부부). 나는 사실 처음에 주진모와 조인성의 동성행각이 발각되면서 주변의 신하들과 송지효의 갈등을 그릴 줄 알았습니다. 조인성은 동성애자다 라면서 그런 장면을 보여준지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송지효와 정사를 나누고 사랑에 빠지는 걸 보면서 유하 감독은 역시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이 조금 모자라지 않나 싶군요.








  사실 별로 감상이라고 쓸만한 것도 없습니다. 누구말대로 80억 짜리 조인성 주진모 송지효 누드집이라는 말처럼, 그냥 5~6 번의 조인성과 송지효의 정사씬만 있을 뿐. 미인도는 조선시대 야동을 한편 만들더니 쌍화점은 고려시대 야동을 한 편 만드네요. 여담이지만 두 작품을 같이 봤던 친구는 말했습니다. 차라리 그 돈으로 웹하드 결제해서 2시간짜리 풀 야동 노모로 몇십개 받는게 낫지 않겠냐고.. 뭐 남자인 관점에선 그렇네요. 

  이 영화는 당연하지만 여성분들이 엄청 많이 보러 옵니다. 조인성과 주진모라는 엄청 멋있는 배우들이 등장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제가 봤던 때에는 장난아니네요. 여성분들도 감동적인 영환데도 웃으면서 보고 나도 웃고있고.. 길게 쓰려고 했는데 사실 진짜 너무 할말없는 영화입니다. 아직까지 저는 영화 제목이 왜 쌍화점인지 이해가 안되네요. (극 중 주진모가 부르는 노래가 쌍화점이라는 것은 알고있습니다만 그거 몇번 나왔다고 영화 제목이 쌍화점이라니 --;; 마치 영화 벼랑위의 포뇨에서 해파리 한번 나왔다고 제목을 해파리라고 짓는거라고 해야할까..) 뭐 오랜만에 돈아까운 영화 한편 봤습니다. 친구 한 명은 좋아하는 정사씬이 나와도 태평하게 잠이나 자고있고.. 저는 조인성의 거세장면을 보면서 심영의 '고자라니' 밖에 생각 안나고.. 스토리도 연개성이 없고 쓸데없이 붕 뜨는 장면도 너무 많네요.. 어후.. 영화 보고 나서 이렇게 할말없는 영화는 또 처음인 듯.. 





  대한민국에서 판타지를 읽는 것은 어린애 같은 감수성의 발로이다. 우리네의 어른들은 부끄러움이 너무 많다. 자신이 만화책을 읽는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기전에 방안에서 히히덕 거리면서 읽는 줄로만 알고, 판타지 소설은 애들이나 읽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네의 만화와 우리네의 판타지는 점점 어린이를 위한 문학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타자 打者'  이영도.

  참 필자라는 말을  많이 쓰는 세상이 되었다. 나는 글을 쓸데에는 '필자' 라는 말 대신에 '나'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 나 스스로 '필자' 라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내가 '필자' 가 되면 내 글을 읽는 사람은 '독자' 가 된다. 그 순간부터 필자와 독자가 존재할 뿐, 나와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필력이 약한 나같은 사람에게는 아직까지 '필자' 라는 호칭, 혹은 칭호가 마땅찮게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스스로를 '타자'라 칭하는 이영도가 참 좋았다. 스스로를 향한 호칭에서 진한 겸손을 느꼈다. 실제로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붓으로 글을 쓴다는 말은 어폐가 있지만, 그의 타자라는 호칭은 솔직해서 좋았다. 







  뭐 사실은 그의 필력에 아니 타력에 매료되었다고 해야겠다. 나는 그의 글이 참 좋았다. 그는 글 하나를 써도 이해하기 쉽게 쓰는 편이다. 남들은 어렵다고 말하는 '퓨처워커'나 '폴라리스 랩소디' 같은 소설은 처음 읽으면 참 난해하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도 잘 모르겠고, 결말 또한 가늠하기가 힘든 것도 사실이다. 남들은 '드래곤 라자' 나 '눈물을 마시는 새' 를 좋아할 때에, 나는 아직까지 이영도 최고의 작품을 '퓨처워커'라 생각한다. 이 자리에서 퓨처워커에 대한 내용을 이야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고, 책의 재미도 반감이기 때문에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여러번 읽어보면, 이영도라는 작가의 타력이 얼마나 강렬한 것이가에 대한 충격을 받는다. 나는 어렸을 적 읽었던 드래곤라자보다 커서 다시 읽어본 퓨처워커에서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대뷔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한 타력을 과시하면서 국내에 꽤 많은 충성층을 확포한 몇안되는 판타지 작가이다. '드래곤 라자' 라는 걸출한 처녀작을 PC통신에서 연제하면서 판타지계의 거물이 되었다 이후로 '퓨처워커' '폴라리스 랩소디' '눈물을 마시는 새' '피를 마시는 새' 에 이르는 장편 소설들을 연제하면서 오히려 매니악한 판타지 세계를 열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장편 소설은 다른 판타지 소설과는 무척 틀리다.  초기작인 드래곤라자와 퓨처워커를 제외하면, 흔히 판타지에 등장하는 파이어볼 마법이나 텔레포트 마법, 검사와 마법사의 세계는 써먹질 않는다. 현재 나오는 판타지의 대부분 세계관을 차지하는 '톨킨' 의 세계관을 벗어나, 스스로의 세계관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읽기 편했던 드래곤라자에서 이어지는 폴라리스 랩소디는 참 낮선 작품이 되었다. 해적이 주인공인 판타지 소설이라니? 그리고 거기서는 마법사가 파이어볼이나 텔레포트 같은 주문을 쓰지도 않는다. 뭐랄까.. 나는 이것을 판타지의 신기원이라 표현하고 싶다.

  그의 신기원은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절정을 이룬다. 판타지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깬 기념비적 작품이다. 퓨처워커나 폴라리스 랩소디처럼 어렵지도 않다. 세계관에 대한 고정관념만 격파한다면, 눈물을 마시는 새 처럼 재미있는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람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세련된 반전과 감동적인 내용.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이영도는 자신의 타자 인생에 또 한번 반전과 흥행을 이룩하기도 했다.







  그렇게 대작들을 쏟아내더니, 요즘은 너무 잠잠하다. 피를 마시는 새를 집필하고는 한 3년동안 너무 조용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식은 드래곤라자 10주년 기념 한정판과 신판이 등장한다는 소식. 그리고 오랜만에 카메라 앞에 등장한 그 타자 '이 영 도'.

  나는 물론 그가 집필한 모든 소설을 소장하고 있다. 드래곤라자 초판본부터, 피를 마시는 새. 물론 나도 드래곤라자 한정판을 구매하고 싶었지만, 앞서 밝혔 듯 퓨처워커나 폴라리스 랩소디 같은 작품을 더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렇게 구미가 당기는 구매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번에 10주년 기념판을 발매하면서 날치기로 나온 한권짜리 장편 소설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그림자 자국' 이다.





  




  '그림자 자국'을 1주일 전에 사놓고는 오늘 다 읽었다. 맛있는 것은 나중에 천천히 먹는다는 생각도 아니었는데 (사실 NDS 용 역전재판 3 를 즐기고 있어서 --;;) 읽기 시작한 오늘, 그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이번 장편소설도 무척 난해했다. 그의 타력은 3년간의 공백기간 동안에 더 난해해 진 듯 싶다. 그의 소설들이 한번 읽어서는 제 맛을 보기가 힘든 소설들이라 지속적인 복습으로 내용을 어느정도 습득 할 수 있겠지만,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 소설의 내용이 진짜 원래 그 내용이 맞는지도 조금 의문스럽다. 또 이 글을 읽으면서, 또한번 진화한 그의 타력을 느낄 수 있었다. 잠깐이나마 다음에 나올 장편 소설은 어떻게 될 지 조금은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야할까..

  어쨌든 나와 동향(同鄕)인데다가 농담 하나까지 나의 마음에 쏙 드는 타자 이영도. 3년이나 기다렸다. 그림자 자국이라는 한권짜리 소설로는 그 3년의 갈증을 채워주기에는 많이 부족하지 않나 싶다. 아직 그는 젊고, 나도 젊다. 그리고 우리에겐 글을 읽을 수 있는 충분한 빛과 눈이 있다. 걸출하지 않아도 재미있는 글을 또 들고 나오기를 믿으면서,

 





  시대가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것을 꼽으라면 우리 마음 속에 잠들어 있는 추억들을 끄집어 냅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추억은, 내가 기억하는 한, 영원한 역사의 기록물입니다. 과거의 향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그 향수에 취해 추억의 향수병에 걸리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이 나온다고 해서 '많이 실망스러울 것' 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약간의 기대감은 있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모래요정 바람돌이' 나 '독수리 5형제' 같은 작품을 제외하고 정말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던 작품들을 엄청나게 만들어냈던 감독이기에 이번만큼은 제발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죠.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만화에 대한 어른들의 반응은 사실 좀 시큰둥 합니다. 어찌 마음 속 길을 헤아려, 천리 마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만, 우리 추억에 하나 간직하던 만화를 현실에서는 이야기 하기 싫어하죠. 물론 술자리에서 심심풀이 땅콩정도로 이야기 한 적은 있을지라도, 
  사실 우리네의 어른들은 정말 쑥스러움이 많고 부끄러움도 많습니다. 솔직하지 못하다고 해야하나.. 참 옛날 이야기지만, MBC에서 책을 읽읍시다라는 코너가 있었는데, 그 코너 거리인터뷰에서 감명깊게 읽은 책이 무어냐는 질문에 슬램덩크와 여러 만화책을 거론했다가 된통 욕을 먹은 일은 참으로 유명해서 꺼내기도 민망하죠.

  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성공한 경우가 참으로 드문 듯 하네요. 그냥 아이의 전유물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저런 거 보면 '미친거아냐?? 애도아니고' 뭐 이런 식으로 들고 나오는 통에, 우리 문화에서 은둔형 오타쿠도 생기고 어쩌고 하는거겠죠? 이야기가 많이 딴데로 갔는데, 어쨌든 저는 미술 전공하는 친구를 많이 둔 터라, 어찌하여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 과거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원령공주'나 '이웃집토토로'나 '천공의 성 라퓨타' 같은 작품도 봤었기 때문에 별로 생각없이 보게되었습니다만, 역시나 이건 뭐 애들천국 --;; 그리고 내용도 저는 솔직히 좀 많이 실망스러웠습니다.





  혹시 영화 '지구가 멈추는 날' 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신 적이 있으신지? 예고편에 보여주는 액션신이 전부 끝이고 내용은 '지구를 지키기 위해 인류를 죽이러 온 외계인이 인류의 따뜻한 모습을 보고 한번 봐준다' 라는 내용이 끝이라는 그냥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이 작품 '벼랑 위의 포뇨' 도 똑.같.습.니.다. 내용은 더 간단하게 줄일 수 있겠네요. '포뇨라는 물고기가 사람이 되는' 내용입니다.








론 애니메이션의 효과나 이야기를 이끌어 내는 스토리텔링은 이렇게 간단하게 표현 가능한 것이 아니지만, 보통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나오는 사람의 반응은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만, 조금만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어보면 참 감칠맛 나는 애니메이션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애니메이션을 참 잘 만드는 감독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이번 작품도, 영상미, 케릭터의 표정과 움직임, 그리고 세세하고 작은 것들의 표현력은 정말 최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것이 정말 2D로 직접 표현한게 맞나 싶을 정도로 먹고 이야기하고 움직이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나는 눈이 편안해지는 영화라서, 참 기분 좋게 보았는데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들은,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는 듯 싶습니다. 아름답게 수놓아진 파스텔 톤을 보고 있으면 나도 저 바다속에 들어가 있는 느낌도 들고, 포뇨가 튀어나올 듯한, 아니, 오늘이라도 바다에 당장 뛰어가면 포뇨가 들어있는 유리병을 선물 받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들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애니메이션이 가지는 최대의 강점은, 우리네 어린시절 감수성을 수면위로 떠오르게 하는 잠재적인 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정말 거장임에 틀림없습니다. 저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세계를 창조해내니까요. 그 창조의 힘이, 비록 우리에게는 매우 유치하고 재미없는 일일 것입니다만, 아직 그 나이에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존경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어른들은 참으로 어른스럽지 못합니다. 주인공 소스케의 엄마는 운전을 장난감차 운전하듯이 무척이나 위험하게 운전하고 -물론 생긴것도 장난감 처럼 생겼습니다. 세상이 모두 물에 잠겨있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모두들 배를 한척씩 끌고나와 절망하기 보다는 도시락을 싸고 어디 소풍이나 가는 사람들처럼 모두 즐거운 표정입니다. 참 절망적인 상황인데도, 사람들은 모두 웃고 있습니다. 낙천적인 사람들이라서? 아니면 모두들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는 해병대의 신념으로 가득차서? 아닙니다. 제가 느끼는 이 마을의 어른들은, 모두들 아이들의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입니다. 진심으로 모든 세상이 물로 뒤덮힌 것이 즐겁습니다. 그래서 보이스카웃을 즐기러 나온 것 처럼, 다들 카누를 즐기는 것 처럼 그렇게 재미있게들 웃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이 애니메이션에서 우리네 어른들에게 넌지시 묻습니다. 왜 그렇게 찡그리기만 하고 사냐고 말이죠. 이 애니메이션은 절망을 극복하라든지, 우리에겐 밝은 희망이 있다든지 하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렇게 묻습니다. 지금 현재가 즐겁지 않냐고. 




  참 곰곰히 씹어보면 단맛이 많이나는 콩같다고 해야할까요? 그의 작품들은 하나하나가 어찌보면 속빈 쭉정이같고, 또 어찌보면 살이 통통하게 오른 콩깍지같습니다. 물론 애니메이션이 보여주기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넘쳐흘러버린 내용을 스스로 주체하지 못하는, 또한 정해진 영화시간에 모든 이야기를 끝내지 못하는 중등도비만 애니메이션이 되어버렸고, 우리는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나서 참 돈아깝다, 내용이 이렇게 부실하냐고 불평할 수 밖에 없죠. 다 설명하지도 못하는 내용을 엄청나게 부풀려놓곤 그냥 그들은 그렇게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하고 결말을 맺으면, 당연히 그런줄로만 알았던 옛날의 어린이들이 아니었 듯, 이 애니메이션을 향하는 비난의 화살을 피할 변명의 여지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의 의미는 소설 '어린왕자' 에서 찾아보면 몇개 나오겠네요. 

 양을 그려달라는 것에 구멍이 뚫린 상자를 원했던 어린왕자의 눈과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서,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겐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야
라고 말했던 사막여우가 되어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요, 이제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가 '소스케' 에서 '포뇨' 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속에 길들여진 나의 이름으로, 서로를 소중히 하기를 그리고 서로를 지켜주기를 이야기합니다.



벼랑 위의 포뇨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2007 / 일본)
출연 나라 유리에, 도이 히로키, 야마구치 토모코, 나라오카 도모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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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네이버 벼랑위의 포뇨(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66464)